논평_
저유소 화재 보도에서 외국인노동자 강조한 언론 반성하라지난 7일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저유소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오전 11시 시작된 불길은 다음날인 8일 오전 4시 쯤 260만 리터의 휘발유를 태운 후에야 진화됐다. 8일 오후 경찰은 저유소 화재 사건의 용의자 A씨를 ‘중실화 혐의’로 긴급체포했다.
경찰은 용의자가 저유소 인근 강매터널 공사장에서 날린 풍등이 저유소 잔디밭에 떨어지며 불이 났고, 이 불씨가 휘발유 탱크에서 새 나온 가스에 붙어 폭발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A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9일, 검찰은 “풍등과 저유소 대형화재 사이 인과관계가 부족하다”며 영장을 반려했다.
애초 구속영장 신청이 무리였다는 비판도 크다. ‘고의에 가까운 심각한 부주의’가 전제되어야 하는 ‘중실화 혐의’ 입증이 어렵고 A씨가 비전문취업비자(E-9)를 발급받은 합법 체류자로서 동생까지 한국에 있어 도주 우려도 없다는 것이다. A씨의 실화 여부가 아니라 총체적인 안전 불감증이 이번 사태의 핵심이라는 지적도 이어진다.
통신사, 방송사, 신문사 기사 전반에서 스리랑카인 부각안한 제목을 찾기가 더 어려워
그러나 이 사건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A씨의 국적을 강조한 언론의 보도태도이다. 경찰 발표 이후 언론은 용의자의 국적을 부각한 보도를 쏟아냈다.
경찰이 용의자를 긴급 체포한 직후 연합뉴스는 <경찰 “고양 저유소 화재 관련 실화 혐의로 스리랑카인 긴급체포”>(1보), <풍등 날리다 고양 저유소 화재 유발 혐의 스리랑카인 체포>(3보) 등의 속보로 상황을 전했다.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했을 때도, 영장에 대해 검찰이 수사 보강 지시를 내렸을 때도 연합뉴스는 관련 보도에 <‘고양 저유소 화재’ 풍등 날린 스리랑카인 구속영장>, <‘저유소 화재’ 스리랑카인 영장 신청…“검찰, 수사 보강 지시”> 등의 제목을 붙였다.
방송사 중에서는 MBC를 제외한 6개 방송사가 모두 8일부터 9일 사이 내놓은 저녁종합뉴스 관련 보도 제목에 ‘스리랑카인’이라는 정보를 담았다. MBC는 유일하게 구체적 국적 정보를 제목에 명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관련 보도 제목은 <“저유소 화재 원인은 외국인이 날린 풍등”>으로, ‘용의자가 외국인’이라는 점을 어김없이 부각했다. 보도 내용에 국적 정보를 명시하지 않은 방송사는 단 한 곳도 없었다.
모니터 대상을 저녁종합뉴스로 한정하지 않고 각 방송사가 온라인에 송고한 기사 전반으로 확대할 경우, KBS는 무려 11건, MBN은 6건, MBC는 5건의 기사에서 제목에 ‘스리랑카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제목에 국적정보를 가장 적게 명시한 매체는 채널A로 3건이었다. 온라인 기사에서도 내용에 국적정보를 명시하지 않은 방송사는 없었다.
신문도 별반 다르지 않다.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한겨레는 8일과 9일 지면 관련 보도 제목에 ‘스리랑카인’이라는 정보를 담았다. 보도 내용에 국적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매체는 없었다.
같은 기간 각 매체가 온라인에 송고한 기사를 살펴보면 중앙일보는 온라인에 송고한 4건의 관련 기사 제목에서 국적 정보를 부각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역시 각각 3건의 관련 기사 제목에 ‘스리랑카인’을 명시했다. 경향신문과 서울신문은 이 기간에는 보도 제목에 국적 정보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10일에는 관련 기사 제목에 ‘스리랑카인’이라는 정보를 담았다.
이번 보도행태를 보면 언론인 대부분은 경찰이 제공한 정보이니 여과 없이 받아써도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 보도내용에서 용의자가 ‘스리랑카 노동자’임을 언급한 것은 거의 모든 언론이고, 제목으로 이를 뽑아 부각하지 않은 기사를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였다.
저유소 화재 보도에서 외국인노동자 강조한 언론에 대한 반성과 성찰 필요
그러나 언론인들은 경찰 브리핑을 듣고 무조건 받아쓰기만 하면 되는 존재인가. 경찰 발표라 하더라도 공익보다는 부작용이 크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저널리즘의 원칙에 따라 걸러내는 기본자세가 있어야 한다.
범죄사건에 대한 국민의 알권리는 분명 인정한다. 법원에서도 대중 매체의 범죄사건 보도는 범죄 행태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그에 대한 사회적 대책을 강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범죄사건 보도는 일반적으로 공공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대법원 1998. 7. 14. 선고 96다17257 판결).
그러나 해당 판결에서는 이와 함께 “범죄 자체를 보도하기 위하여 반드시 범인이나 범죄 혐의자의 신원을 명시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고, 범인이나 범죄혐의자에 관한 보도가 반드시 범죄 자체에 관한 보도와 같은 공공성을 가진다고 볼 수도 없다”고 판시했다. 국민의 알권리는 인정하지만, 범인의 신원을 명시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도 공공성을 갖지도 않는다는 의미이다.
특히 범죄 용의자가 사회적 소수자일 때, 여성, 장애인, 이주민, 외국인 노동자, 탈북민, 성소수자 라는 등의 소수자성을 언급 또는 부각하는 것에는 극도로 신중해야 한다. 이는 해당 사건으로 빚어진 불안과 공포, 사회적 동요가 소수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키우면서 혐오로 이어지게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인권위원회와 한국기자협회가 만든 <인권보도준칙>(2014.11 개정) 총강 6조에서도 “언론은 고정관념이나 사회적 편견 등에 의한 인권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용어 선택과 표현에 주의를 기울인다”라고 강조했다. <인권보도준칙>의 이주민과 외국인노동자 인권 조항인 제5장 2조에서도 “언론은 이주민에 대해 희박한 근거나 부정확한 추측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조장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관련 실천요강에 범죄사건과 용의자 국적이나 민족을 부각하지 말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주의사항은 외국에서는 더욱 강조하는데 예컨대, <독일언론협회 보도준칙>에서는 소수자 보호와 선입견 방지를 위해 범죄 용의자의 국적과 종교는 보도금지가 원칙이며, 공개할 상당한 사유가 있을 때만 예외적으로 보도할 수 있다.
백보 양보해 범죄사건에서 용의자의 국적 등 신변을 꼭 밝혀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행위자의 신원을 밝히지 않으면 사실을 특정하기 곤란하거나, 신고나 제보를 토대로 은폐된 범행을 규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거나, 추가 범행을 미연에 막을 수 있는 경우는 예외적으로 범죄혐의자 신변 공개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례처럼 의도성이 규명되지 않은 실화 사건의 경우, 용의자의 신상 정보를 유포해 얻을 수 있는 공익은 없다. 그저 스리랑카뿐 아니라 국내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에 부정적 선입견을 주고 혐오감정을 부추길 부작용만 남은 것이다.
실제 이번 사건에서도 ‘43억 원의 재산 피해를 낸 범인이 스리랑카 외국인 노동자’라는 소식은 곧바로 외국인 노동자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 “스리랑카 근로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지 말라”는 글이 올라온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향후 1년간, 스리랑카 외노자는 받지마라”, “외노인 추방해라”라는 식의 혐오 청원 역시 상당수이다. 비난의 화살이 ‘외국인 노동자’라는 점에 집중된 것이다.
국민의 알권리 충족하려면 용의자 국적 아닌 사고 근본원인부터 살펴봤어야
언론은 경찰 발표와 영장신청을 베껴 쓰기에 앞서 “외국인노동자 한 사람이 대낮에 풍등을 날린 것이 이와 같은 대형화재의 근본원인이라 볼 수 있는가”를 되물었어야 한다. 저유소 탱크 옆 잔디에 불이 붙고 폭발이 있기까지 18분 동안 관리 책임이 있는 대한송유관공사는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CCTV가 45대나 설치돼 있다고 하지만 모니터링 전담 인력이 없어 사고를 막지 못했다.
대한송유관공사는 공기업으로 출발했지만 2001년에 민영화된 민간 기업으로, 최대주주는 SK이노베이션(41%)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기보다는 경찰 발표를 앵무새처럼 받아 적는데 급급했다. 경찰과 언론의 합작으로 저유소 화재의 근본 원인은 ‘스리랑카 노동자’인 것처럼 각인된 것이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이러한 언론 보도 행태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 언론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범죄보도에서 용의자의 신상, 특히 소수자성을 부각하는 보도행태를 중단해야 한다. 이를 위해 언론 모두가 깊이 반성하고 성찰하고 변화하기를 촉구한다. <끝>
10월 11일
(사)민주언론시민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