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_
방송계 성폭력, 방통위의 실효적 제재가 필요하다
등록 2018.04.19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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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몸담았던 프로그램 현장 거의 모든 곳에 성폭력이 존재했다.”

 

방송제작 현장 성폭력 실태조사에 참여한 한 응답자의 증언이다. 방송계갑질119와 방송스태프노조 준비위원회에서 방송 스태프 223인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했더니 89.7%에 해당하는 200인이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 정도면 성폭력 피해를 당하지 않은 게 오히려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담하다. 이들은 한결같이 제작 현장에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만연해있는 원인으로 ‘성폭력 행위자와의 권력 관계’, ‘비정규직·프리랜서 등 고용 상 불안’ 등을 주요하게 꼽았다. 방송 제작 업무와 고용 형태의 특수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제작현장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이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권력형이며 구조적 범죄라는 걸 의미한다.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피해자들의 80.4%가 문제제기조차 하지 못한 채 그냥 참고 넘어갔다는 점이다. 밉보이면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방송 스태프들은 성폭력 사건 발생 시 이를 처리할 성폭력 전담기구가 없을 뿐 아니라, 있다 해도 자신들에게는 신고하고 처리를 요구할 자격도 주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신고해봤자 현장에서 불이익만 받을 뿐이라는 두려움이 컸다. 비정규직 스태프들에 대한 일상적인 차별 문화와 성폭력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왜곡된 성 인식이 방송제작 현장 내에 만연하기 때문이다. 방송사들의 통렬한 반성과 단호한 개선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이제라도 방송제작 현장을 떠받치고 있는 수많은 비정규직·외주제작사의 노동자들이 겪을 수 있는 성폭력 피해를 예방하고, 피해 발생 시 공정하고 적절한 처리와 구제를 기대할 수 있는 시스템을 방송사에서 마련해야 한다. 방송사의 조직 보호 차원이 아니라 철저히 비정규직·프리랜서 등 을·병·정 방송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신고 기구를 설치하는 것도 시급하다.

 

최근 KBS·MBC·SBS 등 지상파 방송 3사를 비롯한 일부 방송사에선 드라마 제작 현장을 중심으로 성폭력 예방 교육을 강화하거나 성폭력 방지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등의 조치를 하고 있다고는 한다. 하지만 방송사의 선의에만 맡겨서는 실질적인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와 방송사, 제작사뿐 아니라 비정규직을 비롯한 방송제작 스태프들이 참여하여 함께 성폭력 피해에 대응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이행여부를 철저히 감시해야만 한다.

특히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제작 현장에서 발생하는 권력형 성폭력에 대해 제대로 조치하지 않는 방송사에 엄정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지난해 12월 방송통신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고용노동부, 공정거래위원 등 정부 5개 부처는 방송프로그램 외주제작시장 불공정관행 개선 종합대책을 통해 지상파 방송사와 종합편성채널, 케이블 방송사와 외주 관련 협회 등이 참여하는 인권선언문을 제정하고 이에 대한 준수를 재허가 조건으로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방송제작 현장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을 비롯한 인권 침해에 대한 정부의 개선 의지가 그저 명목상의 의지로 남지 않고 실효성 있는 조치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정부와 방송사업자, 현장 스태프 등이 함께 마련한 가이드라인을 준수하지 않는 등의 행태를 보이는 방송사에 대해서는 재허가(재승인)때 감점을 하거나 방송발전기금의 지원을 배제하는 등의 실질적인 제재가 필요하다.

 

아울러 방송·언론계 전반의 자성이 중요하다. 사회 곳곳에서 피해자들의 고발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방송계·언론계 미투는 여전히 미미한 상황인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피해자들이 현재의 방송 구조와 문화 안에선 폭로하고 고발해봤자 곧 더 큰 피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여겨 체념했기 때문이다. 이번 설문에 응답한 방송 스태프 열 명 중 아홉이 피해를 당했다고 할 정도면 방송계는 다른 어떤 영역보다 불평등한 성 인식이 깊이 뿌리내린, 고질적인 온상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도 방송사와 언론사들은 사회 다른 곳에서의 미투 고발은 앞 다투어 다루고, 선정적으로 소비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이야말로 남의 눈에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행태 아닌가. 이제라도 방송사와 언론사 스스로 침묵의 카르텔을 끊어야 한다. 방송·언론계 내부에 만연한 갑질 문화와 성 평등 의식이 부재한 현실을 인정하고 스스로 이를 고백하며 해결에 나서라. <끝>

 

4월 19일

(사)민주언론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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