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보신각 타종행사를 중계한 KBS가 시청자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 타종행사 현장 상황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지난 31일 밤부터 시작된 타종행사에서는 여느 해와 다른 진풍경이 벌어졌다. 수만 명의 시민들이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고 이른바 'MB악법'을 반대하는 피켓과 촛불을 들고 모여든 것이다. 시민들은 행사 중간 중간에 '이명박은 물러가라', '언론악법 반대한다'는 등의 구호를 외쳤고, 오세훈 시장이 등장하자 거센 야유를 보냈다. 축하행사가 진행된 무대 앞 쪽으로는 누리꾼단체와 시민사회단체, 정당의 깃발이 나부꼈다.
그러나 당시 타종행사를 생중계한 KBS는 '촛불시민'들과 깃발로 가득 찬 현장 모습, 구호와 야유 소리를 완벽하게 가렸다. 카메라 앵글을 교묘하게 잡아 축하공연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만을 담았고, 구호 소리는 모두 차단했다. 오세훈 시장에게 쏟아진 야유는 '박수음향'으로 덮었다. KBS의 생중계만 본 시청자라면 이날 타종행사에서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타종현장을 왜곡했다'는 비판이 쏟아지자 KBS 예능제작국 오세영 국장은 오히려 "시위를 방송하려고 중계하러 나간 것은 아니다", "우리 행사가 (시위로) 방해받았다", "(시위가) 행사목적에 위배된다"고 반박했다. 타종행사 생중계는 'KBS 프로그램'의 하나이며, 따라서 '기획의도'에 맞지 않는 장면과 음향을 잘라낸 것이 왜 '왜곡'이냐는 항변이다. "박수소리를 넣은 것은 현장 행사에서 어느 프로그램에나 쓰이는 방송 테크닉"이라는 주장도 폈다.
이런 시각이라면 타종행사장에서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친 시민들은 KBS가 연말특집으로 준비한 '예능프로그램'에 나타나 '방송사고'를 낸 사람들이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KBS의 '항변'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KBS가 타종행사를 특별생방송 <가는해 오는해>라는 프로그램으로 다뤘지만, 타종행사가 KBS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열리는 것은 아니다. 타종행사는 시민들이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는 행사다. KBS도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시민들의 소회와 기대를 담기 위해 특별생방송을 준비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현장의 모습을 적어도 '왜곡'해서는 안될 일이다. 지나간 일 년에 대한 평가, 새해에 대한 기대는 시민들마다 다르고, 기대를 표현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올해의 경우 이명박 정권의 독선적인 국정운영에 반발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KBS가 이들의 모습이나 주장을 적극적으로 다룰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자르고, 야유를 박수소리로 바꾸는 것은 명백한 현실 왜곡이자 조작이다. KBS가 타종행사를 중계해온 일반적 관례에 따랐다면 보신각에 피켓과 깃발을 들고 운집한 수많은 시민들이 이토록 철저하게 화면에서 쏙 빠질 수 있었겠는가?
더 심각한 문제는 1일 KBS 저녁종합뉴스였다. 이날 KBS <뉴스9>는 보신각 타종행사에 등장한 '촛불시민'들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 타종행사에서 '반정부시위'가 벌어진 사건이 이렇게 무시해도 좋을만큼 뉴스가치 없는 일인가?
이명박 정권이 정연주 KBS 사장을 초법적으로 쫓아내고 이병순 씨를 사장자리에 앉힌 후 KBS의 '정권 눈치보기', '정권 홍보' 행태는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하고 있다. 시청자들도 KBS의 이런 '변질'을 감지한지 오래다. 이번 타종행사 왜곡이 현장 제작진의 '실무적 판단'이라고 믿는 시민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시민들은 이번 사건을 이명박 정권의 방송장악이 불러온 '재앙'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더 크게 분노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이병순 씨가 KBS 사장자리에 앉았지만, '공영방송 KBS'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KBS 보도를 모니터하고, 문제점을 질타한 것도 KBS가 공영방송으로서 '최소한'은 해주기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KBS가 국민은 무시하고 정권만 무서워하면서 '정권 홍보방송' 역할이나 하겠다면 시청자들에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KBS 경영진은 물론 모든 구성원들은 이번 사건을 'KBS의 위기'가 심화되는 계기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 위기는 공영방송으로서 '신뢰의 위기'다. KBS가 조금이라도 시청자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자 한다면 타종행사 왜곡을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 물론 이 사과만으로 KBS의 근본적인 위기가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정권 눈치보기', '정권 홍보'로 나아가고 있는 KBS 보도 전반을 쇄신하고 공영방송의 역할을 되찾아야 한다. 지금처럼 나가면 KBS를 향한 국민의 분노는 폭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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