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결국 새해 예산안과 예산 부수법안을 강행 처리했다. 12일 한나라당은 야당과 합의한 약속까지 파기하고, 법안의 강행처리를 막는 야당 의원을 강제로 끌어내면서 예산안 통과를 밀어붙였다. 예산안 심의는 겨우 4일밖에 하지 않았고, 무려 13개나 되는 부자감세법안 등은 단 10분 만에 통과됐다.
1% 부유층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16조원 부자감세, ‘대운하 의혹 예산’ 1조 7천 억원,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의원의 지역구인 포항의 건설예산 4천370억원, 경찰청 진압장비 확충 519억원, 법무부 공안수사비 확대 38억4천800만원 등등 통과된 예산안과 부수법안들의 내용은 그야말로 ‘강부자 예산’, ‘삽질 예산’ ‘형님 예산’이라고 할만큼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반면 비정규직, 자영업자, 농민, 청년실업, 등록금 지원을 위한 예산, 사회적 약자를 위한 예산, 지역 예산, 남북교류예산 등은 아예 한 푼도 배정하지 않거나, 대폭 삭감됐다. 특히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 예산은 한 푼도 반영되지 않았고, 10여만 명의 빈곤·서민층 어린이들의 소중한 삶터였던 지역아동센터 예산까지 대폭 삭감됐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무엇보다 앞서 배려해야 할 서민경제 지원, 사회안전망 보장 등을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부자감세 16조로 인한 정부 재정 부담은 결국 국민 세금으로 돌아올 것이 뻔하다. 그러나 조중동은 이번에도 예산안과 부수법안들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외면한 채, 여야를 싸잡아 비난하거나 ‘예산의 효율적 집행’을 언급하는 데 그쳤다.
15일 주요 신문들은 일제히 한나라당의 예산안 강행 처리를 사설로 다뤘다.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은 예산안 내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강행처리한 한나라당을 비판했다.
한겨레신문은 사설 <오만과 독선으로 난국 헤쳐갈 수 없다>에서 한나라당이 “야당과 합의한 약속까지 파기함으로써 오만과 독선의 실체를 드러냈다”며 사회 안전망이나 일자리 예산은 거의 늘리지 않으면서 “부자 감세에 ‘삽질 예산’은 크게 늘렸다”고 비판했다.
또 ‘4대강 정비사업 예산 통과’, “‘형님예산’ 책정”, “공안수사비, 법질서 바로세우기 운동 추진” 등을 지적하며 “부자 감세로 세입이 줄고 국채 발행은 늘어나 재정 건전성이 더 나빠지게 됐다”고 비판했다. 부수법안을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의장이 직권 상정으로 처리한 것, 여야 간 합의를 깬 것에 대해서도 “여야 합의의 정신은 실종됐으며 한나라당은 청와대의 돌격대를 자임”했다며 법안처리 절차의 문제도 질타했다.
경향신문도 사설 <한나라당, 국민과 전쟁하겠다는 것인가>에서 강행 통과된 예산안이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사회간접자본(SOC)투자가 경기부양용이라고 주장하지만 전년도보다 늘어난 5조원의 상당부분은 이른바 ‘대운하 의혹 예산’과 ‘형님(포항)예산”이며 “경제위기 국면에서 가장 시급한 일자리 창출예산이나 중소기업 및 금융시장 안정예산은 전년 대비 소액 증가”에 그쳤고, “지방재정은 보전대책 미비로 사실상 내년에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예산안이 이 지경이 된 데에는 “한나라당이 야당과 이미 합의했던 사항조차 반영하지 않고 졸속으로 예산안을 마음대로 주물렀기 때문”이라며 한나라당에 책임을 물었다. 이어 “당장 규제완화와 관련된 은행법·공정거래법 개정안과 같은 경제법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비 준등의 강행 처리가 예상된다”며 “대화와 협상이라는 의회 민주주의의 기본정신마저 무시한 여당이 이제는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려는 것인지 묻고싶다”고 한나라당의 독선을 질타했다.
조선일보, “국회는 구제 불능” 싸잡아 비난하며 예산안 문제점은 침묵
반면, 조선일보는 ‘국회의 수준’, ‘구제 불능’ 운운하며 여야의 대립을 싸잡아 비난함으로써 예산안과 부수 법안의 진짜 문제를 가렸다.
사설 <‘예산안 통과 쇼’가 보여준 우리 국회의 수준>에서 조선일보는 “국회의 올해 예산안 심의·의결 과정은 시종 졸속과 파행의 연속”이었다면서 “헌법이 정한 예산안 처리시한보다도 늦었다”, “정치 공방 속에 툭하면 회의가 공전하면서 제대로 된 심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자료를 정독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시간에 국민 세금을 얼마나 걷고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문제가 결정된 셈”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야당에서 제기한 예산안과 부속법안들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당의 표결거부와 민노당의 본회의장 단상 점거를 두고 “국회가 원칙도 규율도 없는 무법천지로 전락한 것”이라고 맹비난 했다. ‘예산안을 졸속 검토했다’, ‘세금이 몰래 새는 곳을 찾아내는 데 전념했어야 했다’고 여야를 싸잡아 비난하면서, 정작 예산안의 심각한 문제점에 지적하고 수정을 요구한 야당의 반발은 “무법천지”를 만든 행태로 몰아붙인 것이다.
나아가 조선일보는 한나라당이 금산분리, 출자총액제한 완화, 미디어관련 법 등을 밀어붙이는 데 대해서도 “여야가 주요 쟁점 법안을 놓고 격돌을 이어가겠다고 예고했다”고 표현했다. 문제 있는 법안들을 강행처리하려는 한나라당의 책임을 물타기하고 ‘여야가 또 싸운다’는 식으로 상황을 호도한 것이다.
동아일보, ‘예산안이 저소득층, 중소기업 지원에 초점 맞췄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역시 예산안과 부속법안의 문제점은 침묵하고, 정부를 향해 ‘통과된 예산을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집행하라’고 주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의 강행 처리를 감쌌다.
중앙일보는 사설 <선택과 집중으로 예산 집행 효율 높여야>에서 “이미 예산안 처리 시한을 훌쩍 넘겼지만 그나마 더 늦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평가했다. 또 내년 예산안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시예산”이기 때문에 예산안을 빨리 처리하는 게 중요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예산 집행을 얼마나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하느냐가 관건”이라며 일자리 창출과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재원에 대해 “재정 투입의 필요성이 긴급하지만 그럴수록 효율성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예산 누수의 구멍을 철저히 틀어막고 경제위기 극복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곳에 재정지출을 집중”하고 “당장 경기부양 효과가 크면서도 미래의 성장에 확실히 기여할 수 있는 사업에 지출을 집중해야 한다”는 등 원론적인 말만 늘어놓았다.
또 경제위기 대책의 규모가 선진 각국의 지원 규모에 비하면 미흡하다면서 “부족한 예산을 적기에 효율적으로 쓰는 수밖에 없다. 경기 침체가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내년 초에 재정지출을 집중하고, 필요하다면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할 각오로 적극적인 집행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통과된 예산안을 ‘효율적으로 적기에 쓰라’는 뻔한 당부를 반복한 셈이다.
동아일보는 사설 <‘경제 비상 예산’ 효과 높이기, 정부 실력 보여라>에서 아예 통과예산안이 “경제 활성화를 비롯해 유동성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 지원, 저소득층에 대한 사회안전망 마련 등 경제 위기 극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면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정부는 즉각적이고 효율적으로 예산을 집행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나아가 “이번 예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경기 부양을 위한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이 대폭 증액됐다는 점”이라며 “도로망과 철도망 확충 등에 돈이 투입되면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될 것”, “국책은행 출자 및 보증기관에 대한 출연 확대로 중소기업에 자금을 공급할 실탄도 확보”, “이런 조치들이 감세(減稅)와 맞물린다면 효과는 더욱 커질 것” 등등 ‘장밋빛 전망’을 내놨다.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는 “그동안 정부가 내놓은 각종 경기 관련 대책이 효과를 내지 못한 것은 국회에서 예산안과 부수 법안들이 통과되지 않은 탓도 컸다”면서 ‘국회 탓’을 하더니, 이제 예산안과 관련 법안이 통과됐으니 “특단의 예산 집행”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조기 집행의 시간표를 짜야 한다”, “예산의 적기(適期), 적소(適所) 투입에 국가의 명운이 걸렸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이명박 대통령의 ‘예산 조기 집행’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다.
한 술 더 떠 동아일보는 정부가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는 각종 경제 살리기 법안의 조속한 처리에도 여당과 더불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가 주장하는 이른바 ‘경제 살리기 법안’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한나라당이 밀어붙이려는 금산분리, 출자총액제한 완화 등을 의미한다면 그야말로 정부와 여당의 독선과 국회 파행을 조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산안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예산’을 짜는 것은 더 중요하다. 한나라당이 강행처리한 예산안과 부속법안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역주행’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경제위기를 벗어나려면 서민 지원 예산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서민들의 세부담을 줄이는 한편 실업·고용·일자리를 위한 정책 예산, 사회안전망을 위한 예산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내수가 살고, 우리 경제가 살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처방’이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정부 여당이 내놓은 예산안은 이런 처방을 뒤집어 놓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조중동은 이런 예산안의 문제점을 따지기는커녕 ‘국회가 이전투구를 벌이며 예산안을 빨리 처리하지 않았다’, ‘이제라도 처리했으니 다행이다’라는 주장이나 펴고 있다.
이처럼 조중동이 정부 여당의 ‘역주행’ 처방을 감싸고 두둔하는 것은 국민을 불행에 빠뜨리는 일일 뿐 아니라 제 발등을 찍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위기가 조중동만 비껴가지는 않는다. 조중동은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벌이고 있는지 한번이라도 생각해보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