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권의 KBS 장악 시도가 프로그램 편성에서도 관철되고 있다.
정연주 사장 축출, ‘청부사장’ 이병순씨 임명, 사원행동 소속 직원과 스페셜팀 등에 대한 보복·숙청 인사, 뉴스 프로그램의 비판성 상실에 이어 정부 여당이 ‘눈엣가시’로 지목해온 프로그램들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29일 KBS가 정기이사회에 보고한 TV 및 라디오 가을 개편안에 따르면 <미디어 포커스>와 <생방송 시사투나잇>의 명칭과 방송 시간대를 바꾼다고 한다. <미디어 포커스>는 <미디어 비평>으로 바꿔 금요일 밤 11시30분부터 30분간 방송하고, <생방송 시사투나잇>은 <시사터치 오늘>로 명칭을 바꿔 월∼목요일 밤 12시15분∼12시45분 방송된다고 한다. 명칭, 시간대 변경과 함께 제작진도 교체될 것으로 보여 <미디어 포커스>와 <생방송 시사투나잇>은 사실상 폐지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언론권력의 횡포를 견제한 <미디어 포커스>, 성역 없는 비판 보도를 해왔던 <생방송 시사투나잇>은 ‘공영방송 KBS’의 위상을 높인 프로그램들이다. KBS는 두 프로그램을 형식적으로 ‘존치’시켰다고 주장하겠지만 <미디어 포커스>와 <생방송 시사투나잇>의 정체성을 훼손할 의도가 없었다면 굳이 제작진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프로그램 이름과 방송 시간을 바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병순 씨 취임 이후 달라진 KBS 뉴스를 볼 때, 우리는 새 프로그램들이 논란 없는 ‘연성 아이템’만을 다루거나, 정권을 교묘하게 두둔하고 옹호하는 역할을 할 지 모른다는 우려가 든다. 그렇게 된다면 ‘폐지’만도 못한 ‘존치’가 되는 것이다.
그동안 한나라당과 ‘뉴라이트’ 세력은 <미디어 포커스>와 <생방송 시사투나잇>을 ‘좌파방송’, ‘코드방송’으로 음해해 왔고, 이명박 정권의 ‘청부사장’ 이병순 씨는 이 프로그램들을 ‘손보겠다’고 화답했다. 이병순 씨는 지난 8월 취임사를 통해 “대내외적으로 비판받아 온 프로그램,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도 변화하지 않은 프로그램은 존폐를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밝혔는데, 그 ‘공약’을 착실하게 이행한 셈이다.
이 외에도 KBS는 <특파원 현장보고>, <아시아 투데이>, <아시아의 창>, <한국사 전>도 제작비 문제를 들어 폐지키로 했다. 모두 ‘공영방송 KBS’의 정체성에 걸맞는 시사교양프로그램들이다.
한편 KBS는 <생방송 심야토론>, <생방송 열린토론>의 진행자인 시사평론가 정관용 씨와 <윤도현의 러브레터> 진행자인 가수 윤도현 씨도 교체하기로 했다. 역시 ‘제작비’가 교체 이유라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KBS 측은 “제작비 절감을 위해 출연료가 비싼 외부 MC의 기용은 자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KBS의 이런 ‘해명’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정관용, 윤도현 씨 정도의 진행자를 교체할 때 눈에 보이는 출연료만으로 득실을 따질 수 있는지 의문이다. 진행자의 역량이 프로그램의 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프로그램의 질’이 중요한 시청자 입장에서는 역량 있는 진행자부터 잘라서 경비를 절감하겠다는 발상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아니나 다를까 KBS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이명박 정권의 ‘눈 밖에 났기 때문에 잘렸다’는 설이 파다하다. 정관용 씨는 진보 성향의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의 이사를 맡고 있고, 윤도현 씨는 지난 촛불집회 때 무대에 선 것이 ‘잘린’ 이유라는 것이다.
지금 KBS에 대한 시청자들의 신뢰는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청부사장’ 이병순 씨가 들어선 자체가 공영방송 KBS에 큰 상처를 냈고, 권력 비판에 점점 무력해지고 있는 KBS 뉴스가 KBS의 공신력을 갉아먹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이번 가을 개편안은 시청자들에게 ‘KBS에 대한 신뢰를 접으라’고 독촉하는 것과 다름없다. 비판 프로그램 ‘손보기’, 제작비 절감을 빙자한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축소, 정치적 이유에 따른 진행자 교체 논란을 일으킨 개편으로 어떻게 시청자의 신뢰를 받을 수 있겠는가?
이병순 씨가 ‘KBS 출신’으로서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KBS를 망가뜨리는 이런 개편안은 접어야 한다. 이대로 가면 KBS는 미래가 없다. 공영방송이 시청자를 포기하고 권력을 쫓을 때 국민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는지는 KBS 구성원들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