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거의 모든 신문들이 16일 환율폭등과 주가 대폭락을 주요하게 보도했다. 조선일보도 예외는 아니다. 조선일보는 <다시 덮친 공포… 코스피 사상최대 폭락…>을 1면 톱으로 싣고 16일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의 충격을 전했다. 이어 A3면, A4면에도 ‘글로벌 금융위기’란 특집으로 국내 금융시장과 세계 경제위기를 다뤘다.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상황에서도 조선일보는 파이낸셜타임즈를 비롯한 외신들의 한국 경제 관련 보도를 자신있게 비판하면서 이명박 정부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16일 우리단체 논평 <‘용감무쌍’한 조선일보의 외신비판> 참조)
17일 환율폭등과 주가대폭락을 보도하는 와중에도 조선일보는 이명박 정부를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대통령, 잘 했어요”?
8면 기사 <이대통령이 ‘달러 사재기’ 경고했던 까닭은>에서 조선일보는 이명박 대통령이 대기업들의 ‘달러 사재기’를 질타한 것이 효과가 있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기사는 “10월 들어 환율이 1400원대까지 폭등하자 한 정부기관이 주요 대기업들의 달러 보유 현황에 대해 은밀히 조사를 벌였고, 이를 토대로 대기업별 달러 보유 실태 보고서를 청와대에 올렸는데, 보고서에는 대기업들이 평소 수출·입 거래에 필요한 규모 이상으로 달러를 보유하고 있으며, 일부 환투기 의혹도 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고 썼다.
이어 한 정부 관계자가 “이 대통령이 이 보고서를 보고 상당히 노했던 것으로 안다”며 “보고서가 올라간 직후 이 대통령의 ‘달러 사재기’ 발언이 나왔고, 일부 정부 관계자들도 대기업에 경고성 메시지를 전했다”고 전했다. 결국 지난 10일 20대 그룹 자금담당 임원들이 긴급 모임을 가졌고, “정부가 우리를 환투기 세력으로 몰고 있는데, 억울하다”라는 불만이 나오긴 했지만 정부정책에 “협조”하는 차원에서 외환 시장에 본격적으로 달러를 내다 팔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사는 “실제로 삼성 포스코 현대자동차 효성 등 대기업들은 이날부터 본격적으로 달러를 내다 팔기 시작했고, 환율은 급락했다”고 끝난다. 즉, 이명박 대통령이 대기업의 ‘달래 사재기’를 질타함으로써 대기업들이 달러를 내다 팔았고, 이 덕분에 환율이 급락했다는 게 기사의 핵심이다.
이 기사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웃는 얼굴도 함께 편집이 되어 있고, 그 아래 <정부, 대기업 달러보유 실태 조사>, <일부 환투기 의혹 포착…MB, 격노>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야당은 여당에 협조하라”
같은 면 기사 <경제 원로들 “민주당, 변화 못보고 고정관념 빠져”>는 조순 전 부총리,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한덕수 전 총리 등이 민주당 지도부와 간담회를 열었다는 내용이다. 조선일보는 이날 ‘경제 원로’들의 발언 가운데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을 비판한 내용은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서, 이들이 ‘민주당이 정부 여당과 협조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점을 집중 부각했다.
그러나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 16일 기사 <조순 “경천동지의 시기, MB정부 고정관념 벗어야” 박승 “지금은 초입단계…4~5년 장기침체 시대 될 것”>를 보면 ‘경제 원로’들은 민주당에 대한 고언 못지않게 이명박 정부의 경제 운용 기조에 대해서도 큰 우려를 나타냈다.
특히 조선일보가 16일 사설을 통해 맹비난한 영국 파이낸셜타임즈의 한국 경제위기 관련 보도에 대해 조순 전 부총리는 “한국은 개인도 은행도 부채가 많다. 장기 외채는 IMF 때보다 더 많다”며 공감을 표했다. 또 “(파이낸셜타임즈가) 중소기업이 갚을 능력이 없어 부담이라고 지적했는데, 하나하나가 국민들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의 외환위기 가능성을 경고한 파이낸셜타임즈 보도에 대해 조 전 부총리는 경청할 비판은 받아들이며 위기관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조 전 부총리의 발언 가운데 “민주당이 너무 많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야당도 앞을 내다보는 관점에서 과감히 변신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정부에 반대만 하는 ‘옛날식’으로는 안된다”는 등 민주당에게 여야협력을 요구하는 내용들만 전했다.
“그래도 MB노믹스는 옳다”
외부 칼럼을 통해 “MB노믹스를 차질없이 진행시켜야 한다”는 주문도 내놨다.
민충기 씨의 칼럼 <경제위기, 본질은 ‘오만과 도덕적 해이’>는 “이번의 금융위기를 빌미로 시장경제를 불신하거나 특히 그동안 고개를 숙여 왔던 좌파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은 경계해야 한다. 자칫 세계 경제의 물줄기가 다시 역행하는 대혼돈의 시기로 빠져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며 “지금의 금융위기는 자유 방임에 기초한 시장경제의 본질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유시장에 대한 지나친 오만과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칼럼은 “금융위기라는 비상 상황을 맞아 정부가 불가피하게 시장 개입을 하더라도 시장 경제의 기본 원칙을 지키면서 약속한 MB노믹스의 계획들을 차질 없이 진행시켜야 된다”고 요구하기도 했다. 다만 칼럼 말미에 슬쩍 “버블이 심한 금융 부문에 대한 규제 철폐는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주문하고 싶다”며 빠져 나갈 구멍 정도를 덧붙였다.
최근의 경제위기 본질이 고삐 풀린 금융자유화 등 미국식 시장지상주의 경제 체제의 구조적 결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 주체들의 오만과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된 것이며, 여전히 ‘MB노믹스는 옳은 방향’이라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16일, 17일 조선일보 경제 보도의 경향을 정리하자면,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본질을 짚어내지 못한 채, 갈팡질팡 현상을 쫓아 보도하면서 △이명박 정부의 경제 실정을 감싸줄 수 있는 고만고만한 보도들도 실어야 하고 △이명박 정부에게 불리한 주장은 보도하지 않거나 적극 반박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그야말로 ‘언발에 오줌누기’가 아닌가 싶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위기극복의 정답’을 내놓기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일보처럼 보도하는 것은 문제다. 거듭 당부한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지금이라도 경청하고, ‘입에 쓰지만 몸에 좋은’ 비판과 충고가 있다면 이를 적극 보도해야 한다. 온 세계가 미국식 금융자본주의를 성찰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명박 정부를 향해 ‘좌파가 발호하지 않게 하자’, ‘그래도 MB노믹스는 옳다’는 따위의 조언을 들려주는 것은 독약을 주는 꼴이다.
요즘 같은 때는 조선일보가 경제보도만큼이라도 좀 잘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