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서 민주주의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이번에는 국방부가 ‘불온서적’ 목록을 만들어 해당 책들의 군내반입을 차단하겠다고 나섰다.
지난달 19일 국방부는 “불온서적 무단 반입시 장병의 정신전력에 저해요소가 될 수 있어 수거를 지시하니 적극 시행하라”는 내용의 공문과 함께 북한 찬양, 반정부·반미, 반자본주의 등 세 분야로 나눠 23권의 ‘불온서적’ 목록을 각 군에 내려 보냈다고 한다.
이 ‘불온서적’ 목록에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문학작품, 인문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대학교재 등이 올라가 있다. 예를 들어 현기영의 성장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가 ‘북한 찬양’ 도서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반정부·반미’ 도서로, 세계적인 석학 놈 촘스키의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가 반자본주의 도서로 이름을 올렸다.
무슨 근거로 이런 책들을 ‘불온서적’으로 규정했는지 의문스러울 뿐 아니라, ‘불온서적’ 목록을 만들어내어 군 장병들을 통제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낡고 낡았다. 각계에서 시대착오적인 조치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해당 도서들의 판매가 급증함으로써 국방부의 행태가 국민 일반의 정서와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7월 31일부터 주요 일간지와 방송사들은 이 사건을 보도했는데, 한겨레와 경향신문, MBC가 가장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 한겨레신문 관련 보도
<군, 대학교재 베스트셀러도 “불온서적”> (7.31 1면)
<IMF 정책 비판했다고 ‘반정부 딱지’> (7.31 6면)
<국방부 “불온서적 선정·차단 계속하겠다”> (8.1 13면)
<퇴행적이고 반지성적인 군의 도서검열> (8.1 사설)
<국방부 ‘홍보’ 덕분에 … ‘불온서적’ 판매 불티나네> (8.2 8면)
한겨레는 31일 1면 <군, 대학교재·베스트셀러도 “불온서적”>을 통해 “국방부가 대중성 높은 인문교양서와 십수만권이 팔린 베스트셀러까지 ‘불온 서적’ 딱지를 붙여 수거명령을 내린 것으로 드러났다”며 공군참모총장 명의의 공문을 처음으로 보도했다. 이어 6면에도 <IMF 정책 비판했다고 ‘반정부 딱지’> 기사를 싣고 학계와 출판계의 반발을 전했다.
8월 1일에는 전날 기사에 대한 국방부의 입장을 다룬 <국방부 “불온서적 선정·차단 계속하겠다”>라는 기사와 사설 <퇴행적이고 반지성적인 군의 도서검열>을 실었다. 사설은 국방부의 조치가 “전체주의 국가나 군사독재 체제가 저질렀던 반지성적이고 야만스런 일”이라며 “이런 퇴행적 조처를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2일에는 <국방부 ‘홍보’ 덕분에 … ‘불온서적’ 판매 불티나네>라는 기사를 통해 국방부의 ‘불온도서’ 목록이 오히려 해당 도서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판매가 급증했다고 보도했다.
- 경향신문 관련 보도
<반년만에 무너지는 ‘민주화 20년’> (8.1 1면)
<매카시 광풍을 연상시키는 ‘불온서적’ 단속> (8.1 사설)
<불온서적 불티나네> (8.2 8면)
경향신문도 1일 1면에서 이 사건을 보도했다. 특히 경향신문은 <반년만에 무너지는 ‘민주화 20년’>이라는 제목으로 국방부의 ‘불온서적 차단’뿐 아니라 우리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주의 후퇴를 지적했다.
기사는 “한국 사회가 민주화 20년 동안 축적한 민주주의 성과가 이명박 정부 6개월 만에 무너지고 있다”며 ‘백골단 부활’, ‘ 불법시위 엄단 조치’, ‘방송장악’ 등과 함께 국방부의 ‘불온서적 차단’ 조치를 보도하며 반발 목소리를 전했다.
같은 날 사설 <매카시 광풍을 연상시키는 ‘불온서적’ 단속>에서는 “대명천지에 금서의 존재 자체도 당혹스럽거니와 누가 어떤 근거로 이들 책에 빨간색을 칠했는지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라고 비판했다. 또 국방부가 이들 서적이 ‘반국가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해명이 “시대착오적 미친 바람의 정체를 숨김없이 보여준다”며 “이명박 대통령이 정부 비판을 국가 정체성의 위협으로 간주하겠다고 밝힌 소통불량의 국정철학이 그 바람구멍”이며 “여기에 군·검·경은 물론 각부 장관들의 코드 맞추기 충성경쟁이 광풍을 키우는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2일에는 <불온서적 불티나네>를 통해 국방부의 ‘불온도서’의 판매가 급증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한편 중앙일보는 1일 <대학교재·베스트셀러 군, 불온서적 지정 논란> 기사를 싣고, 사설 <국방부의 유치한 독서 통제>를 통해 국방부의 조치를 비판했다. 물론 그 비판의 방향은 한겨레, 경향신문과는 차이를 보였다. 중앙일보는 “국가보안법 등 실정법에 위반되지 않은 서적은 누구나 읽을 권리가 있다”는 전제를 깔면서 국방부를 향해 “국가보안법상 이적성 있는 서적만 규제하라”고 촉구했다.
또 사설에서는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대기업 중심의 한국식 개발전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완전경쟁 논리에만 매달리면 한국식 개발전략이 훼손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신자유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한 것”이라며 “이것이 어떻게 ‘반정부·반미’냐”고 따졌다. ‘재벌중심의 경제체제’를 옹호하는 중앙일보의 입장이 부각된 비판이다. 그러나 적어도 중앙일보는 막무가내로 벌어지는 국방부의 시대착오적 조치가 국민들에게 빈축을 사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이를 비판하는 모습은 보였다.
반면, 조선일보는 1일 12면에 <군, 불온서적 23권 지정…반입 금지>라는 2단 기사를 싣는 데 그쳤다. 같은 날 동아일보는 8면에 12줄짜리 1단 기사 <“불온서적 군 반입 차단”>을 실었다. ‘비판언론’으로서 시늉조차 하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이명박 정부에 불리한 기사는 축소하고 유리한 기사는 부풀리는 데 있어서는 독자들의 눈치도 보지 않겠다는 태도다.
한편 방송 3사 메인뉴스들은 31일 국방부의 조치를 다뤘다.
MBC가 <줄줄이 ‘불온서적’>이라는 제목의 보도에서 가장 비판적으로, 자세히 다뤘다. MBC는 앵커멘트를 통해 “국방부 불온서적 목록에 수 십 만 부 팔린 베스트셀러와 대학 교양 교재가 들어갔다”며 “고장난 국방부 시계가 거꾸로 가도 너무 뒤로 세게 돌아갔다”고 꼬집었다. 또 국방부가 ‘불온서적’으로 규정한 책들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저자들과 출판계, 학계의 반발과 대응을 전했다. 국방부가 “장병들의 개인 우편물까지 간부 입회아래 확인하도록 했다”는 사실도 보도했다. 아울러 “장병 정신교육에 관련된 기준을 본다면 밖에서 보는 기준과 다를 수 있다”는 국방부 홍보관리관의 반론도 함께 다뤘다.
KBS는 주요단신 가운데 하나로 이 소식을 전했다. 국방부의 ‘불온서적’에 베스트셀러와 대학교재 등이 포함돼 출판업계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지만, 보도시간이 너무 짧아 국방부 조치가 갖는 의미와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하지는 못했다.
SBS는 <군 ‘불온서적’ 지정논란>이라는 제목의 별도 꼭지로 다뤘지만 국방부 조치가 논란이 되고 있다는 사실과 국방부의 입장을 나란히 소개하는 데 그쳤다. 보도는 국방부의 조치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논란이 일고 있다”며 민속학 대학교재와 장하준 교수의 저서까지 ‘불온서적’에 포함됐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어 국방부가 “한총련이 최근 군대에 도서보내기 운동을 벌일 것이라는 첩보가 있어 서적 반입 차단을 각 군에 지시한 것”이며, “‘불온서적’이란 용어가 적절치 않음을 인정하고 일부가 과도하게 ‘불온서적’으로 분류됐는지 검토해 보겠다”고 밝혔음을 전했다.
경향신문이 지적했듯, 국방부의 이른바 ‘불온서적 반입 차단’ 조치는 우리사회의 20년 민주화 성과를 퇴행시키는 또 하나의 징표다. 국민의 생각과 언론을 통제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퇴행적인 국정운영 마인드에 정부 기관 곳곳이 발맞추고 있다. 그런데도 자칭 ‘비판언론’이라는 조선, 동아일보는 일언반구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 동아일보가 아무리 감싸준들 이명박 정부의 시대착오적인 행태들이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조선, 동아일보가 약간의 눈치라도 있다면 이명박 정부와 일정한 ‘거리두기’를 보이는 중앙일보의 처신을 살펴보기 바란다. ‘친이명박’, ‘친한나라당’ 신문이라는 본질에 있어 다르지 않은 중앙일보가 몇몇 사안에서 조선, 동아일보와 차이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조선, 동아일보가 이토록 노골적으로 이명박 정부에 ‘올인’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방송사들에게 거듭 당부한다. 적어도 우리사회가 합의한 ‘민주주의의 상식’을 거스르는 일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비판하라. 민주와 반민주가 대립할 때 ‘기계적 균형’이나 ‘침묵’은 반민주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