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_
정해진 씨 사망 관련 언론보도에 대한 민언련 논평(2007.10.30)
등록 2013.09.0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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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노동자의 뜻,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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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동자가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7일 오후 인천시전기공사협회와 영진전업에 대한 규탄집회 도중 전국건설노조 인천지부 전기분과 조합원인 정해진 씨가 ‘인천전기원 파업투쟁 정당하다’고 외치며 분신을 시도해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겼지만, 하루도 못 넘기고 이날 저녁 사망했다.
정해진 씨는 주44시간 근로시간 준수, 토요 격주 휴무 보장, 단체협약 체결 등을 주요 요구로 내걸고 131일째 파업을 벌여왔던 건설노조 인천지부 소속 노조원으로, 그동안 파업에 참여해왔다고 한다. 정해진 씨와 그가 속한 노조의 요구는 ‘70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외침과 그리 다를 바 없다. 열사의 분신 이후 37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노동자의 처참한 현실은 그대로이다.


하지만 언론은 이런 참담한 현실을 철저히 외면해 왔다. 현실 뿐 아니라 정해진 씨의 죽음마저도 철저히 무시했다. 조선, 중앙, 동아, KBS는 관련한 내용을 전혀 다루지 않았고, 경향신문과 서울신문은 분신사망 소식을 전하는 데 그쳤다. SBS와 MBC는 사건사고 소식을 전하며 1개의 사건으로 정해진 씨의 분신을 다뤘다.
다만 한겨레가 1꼭지의 기사를 내보내며 관련 내용을 비교적 상세히 전했다. 한겨레는 29일자 12면에 ‘불법 하도급에 희생된 ‘20년 전봇대 위 인생’’이라는 제목의 관련기사를 통해 정해진 씨의 분신사망 소식과 그 배경을 보도했다. 한겨레는 정 씨 죽음의 배경에는 전기공사업체들의 불법하도급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인천지역 전기공사업체들의 노조탄압과 한전의 소홀한 감독에 대한 문제점도 제기했다.
경향신문은 같은 날 1면에 양극화의 심각성을 전하는 기사에서 첫머리에 “서민 1명이 또 자살했다”며 관련 내용을 간단히 전했다. 서울신문은 9면에 짧은 2단기사로 건설노조원이 집회 중 분신 사망했다는 내용을 전한 것이 전부였다.
MBC는 <한 병원서 ‘덜미’>(10.27)라는 꼭지에서 성폭행 관련 사건을 보도한 후 2번째 사건사고로 정해진 씨의 분신을 전했다. MBC는 배선설비업체 앞에서 정비노조원 정모 씨가 단체협약을 거부하는 파업을 벌이다 갑자기 분신을 시도했다며 목격자의 발언을 내보냈다.
SBS도 <산악사고 잇따라>(10.27)라는 사건사고 보도 중 보도 말미에 관련 내용을 다뤘다. SBS는 건설노조 소속 정모 씨가 회사규탄집회를 벌이다가 분신해 화상을 입고 병원치료를 받고 있으나 위독한 상태라는 보도가 전부였다.
한겨레를 제외한 모든 언론이 정해진 씨의 죽음을 사건사고 보도로만 처리한 것이다.


동아일보와 KBS, SBS는 노동자의 죽음은 외면하면서도 노동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판결에 대해서는 힘을 싣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29일 <‘법대로 세상’을 위한 불법 파업 배상판결>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보내고, 철도노조에 불법파업을 이유로 51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과 관련하여 “노사정 현장에서 ‘법대로’가 훼손될 수 없는 가치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며 앞으로도 불법파업을 엄단하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철도노조에 대한 과도한 손해배상 청구를 자제하라고 밝힌 것에 대해서도 “노사문제에 법을 넘어서서 개입하는 정권이 또 탄생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정해진 씨 사망소식을 전하지 않은 KBS도 26일 <‘51억원 배상’>이라는 보도에서 철도노조 파업에 대한 배상판결을 상세히 전하고, “불법 파업에 또 한 번 경종을 울린 판결”이라며 재판부의 결정을 두둔했다.
또 정해진 씨의 분신 소식을 단신만도 못하게 처리한 SBS는 <“파업손실 배상하라”>(27일)에서 “불법 파업을 근절하기 위해 민사적 책임을 엄격하게 묻는 법원의 경향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내년이면 없어질 직권중재제도에 기대어 51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배상액으로 노동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판결에는 불법파업을 강조하며 힘을 실어주면서,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죽음에 내몰린 노동자는 철저히 무시하는 언론의 이중적인 태도에 치가 떨린다. 노동자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기는커녕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행태다.


정해진 씨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불법다단계하도급 문제와 하도급업체의 노동착취, 노조탄압이었다. 한전이 발주한 전기공사를 낙찰받은 인천지역 전기공사업체들은 일용 또는 상용노동자인 전기원을 채용해 일을 맡긴다. 업체들은 전기원들의 노동착취를 통해 낙찰 단가를 낮추는 방식을 써왔다. 이 때문에 전기원들은 평일은 10~12시간 근무에 단전 등 긴급 상황에는 새벽 2, 3시에도 출근하는 등 열악한 근무 조건에서 일해야 했고, 추락, 감전 등 산업재해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왔다고 한다.
이런 현실을 바꿔보고자 인천지역 전기원들이 노조를 결성했지만, 인천지역 전기공사업체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건설노조 인천지부에 따르면 “전기공사업체 대표들에게 단협체결권을 위임받은 유해성 영진전업 대표는 교섭을 회피하고 조합원들을 회유, 협박해 노조탈퇴를 종용하는 등 노조와해공작을 계속 벌여왔다”고 한다. 상식적인 요구 수준의 단협안을 갖고도 131일 동안 파업을 해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하도급업체의 노동착취를 통한 낙찰단가 낮추기, 하도급기업의 불성실한 교섭태도, 원청업체의 관리 소홀, 불법다단계하도급에 대한 노동부의 제재의지 빈약 등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던 구조적인 문제가 한 노동자를 희생시킨 것이다. 또 건설노조 인천지부가 131일째 파업을 하며 이런 문제들을 제기해왔음에도 언론은 이를 철저히 외면하며 노동자의 죽음을 방조했다. 언론은 지금이라도 노동자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노동시장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대선주자들의 행보도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정해진 씨의 사망 소식을 듣고 빈소에 찾아온 대선주자는 권영길 민노당 대선후보와 금민 한국사회당 대선후보 밖에 없었다고 한다. 입으로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 ‘일자리를 창출하겠다’, ‘노동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떠들고 다니면서 정작 파업을 하다가 분신한 노동자는 외면하고, 이 노동자를 죽음에 내몰았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나몰라라하고 있는 것이 대선주자의 진모습이다. 이제라도 대선 주자들은 불법하도급 문제, 도급근로자 처우문제에 대해 구체적이고 진실성 있는 대안을 내놓기를 촉구한다.
대선주자들이 설사 이를 외면한다 하더라도 언론이 나서서 관련한 문제를 이번 대선의 주요 의제로 다뤄야 할 것이다. 정해진 씨가 자신의 죽음으로 이루고 싶었던 것은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좀 더 나은 노동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언론이 이 문제를 계속 방치한다면, 노동자를 또다시 죽음으로 내모는 일에 동참하는 것임을 잊지 않길 바란다.
<끝>

 


2007년 10월 30일
(사)민주언론시민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