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_
‘EBS<시대의 초상> 폐지’에 대한 민언련 방송모니터위원회 논평(2007.8.24)
EBS 정체성 포기하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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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시대의 초상>이 21일 기상캐스터 김동완 편을 마지막으로 6개월 만에 폐지됐다. 이에 대해 EBS 측은 “제작비, 투입인력, 프로그램의 질, 영향력 등의 요소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폐지하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시대의 초상>은 지난 6월 회사 측이 인물선정을 문제 삼으며 프로그램을 폐지할 것을 통보해 논란이 됐던 터라 여전히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시대의 초상>은 3월 봄 개편에서 EBS의 대표적 시사프로그램인 <똘레랑스>, <미디어 바로보기> 등을 폐지하고 내놓은 교양프로그램으로 시작부터 주목을 받았고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런 프로그램이 석연치 않은 근거로 폐지되어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2월 27일 시작한 <시대의 초상>은 80년대 이후 사회 각 분야에서 역사의 한 부분을 장식한 인물의 인터뷰를 통해 그 인물의 삶과 시대를 새로운 각도에서 보여준 인물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가 일반적으로 화면과 내레이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시대의 초상>은 한 인물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인물과 시대를 조명하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줬다.
<시대의 초상>은 인물 선정도 차별성을 보였다. 대부분의 인물 프로그램의 인물선정이 현재 주목받는 인물이거나 이슈의 핵심 인물인 경우가 많다. <시대의 초상>은 이런 경향에 연연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와 계층의 인물을 선정해 시대흐름과 연결시키면서 시청자들에게 그 인물과 시대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했다.
이 프로그램은 문화, 예술, 문학, 정치,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의미있는 평가를 받은 사람들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노력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가 하면, 우리 사회에서 잊지 말아야할 소중한 가치들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기도 했다. 6월 12일 방영된 이용수 할머니 편은 위안부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일본을 대상으로 힘겹게 싸워온 이야기를 전달하며 종전 후 반세기가 지나서도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과제를 뼈아프게 제기했다.
한 인물의 편견을 깨고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11회 굴레를 벗고 거침없이 전진하라-김부선 편’을 본 시청자들은 방송을 통해 김부선 씨에 대한 편견, 선입관을 깨는 데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또 좌우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에 공존하는 여러 생각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진보진영의 대표적인 평화운동가 문정현 신부를 다룬 방영분도 있었고, 민주화운동 과정에 음으로 양으로 큰 기여를 했던 권인숙, 김정남 씨 등을 다룬 방영분도 있었다. 보수진영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는 방영분도 눈에 띈다. 바로 극우보수논객을 대표하는 조갑제 월간조선 대표 편. 조갑제 씨는 극우적 시각이 짙은 인물로 방송이 편향적으로 흐를 수도 있었지만, 제작진이 공격적인 질문과 시대흐름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화면을 배치하며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신선한 포맷도 <시대의 초상>의 강점이었다. 인터뷰 중간중간에 내레이션, 애니메이션, 사진, 영상, 자막 등을 넣어 인물과 시대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삽입된 여러 장치들은 감각적이고 세련된 편집으로 보는 재미를 더했다. ‘역사와 나, 그 삶의 경계-권인숙 편’은 부천 성고문 사건의 전모를 권인숙 자서전을 바탕으로 한 랩과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했고, 재판 장면은 스티로폼 인형으로 모형을 만들어 재연하며 권인숙 씨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이용수 편도 이용수 할머니가 위안부에 끌려간 과정, 위안부에서 피해를 겪은 일 등을 애니메이션으로 재연해 감동을 더했다. 또 이 프로그램은 인디밴드 록과 대중음악들 위주로 배경음악을 틀어 신선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우리는 EBS가 이런 평가를 받고 있는 프로그램을 폐지한다는 사실에 매우 유감스럽다. 특히, 김부선 편 방영 후, 경영진이 인물 선정에 문제를 제기하며 프로그램 폐지 논란이 벌어진 것에 대해서는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경영진의 이런 태도는 편성의 독립권과 제작의 자율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행위다. <시대의 초상> 제작진이 “논란이 됐던 절차적 문제가 해결됐고, 외압도 없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프로그램이 폐지되는 것으로 결론지어진 것만 봐도 경영진의 태도에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EBS는 이번 가을개편에서 <시대의 초상> 뿐 아니라, <EBS 시사, 세상에 말걸다>도 폐지하고, 인문·사회·자연과학 등 전문가들이 강의하는 <EBS 기획시리즈>, 전문지식인이 핵심 지식을 전달하는 <지식프라임>, 외국어 프로그램, 교육문화뉴스 등 인문·교양·외국어 교육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편안을 내놨다.
EBS는 3월 개편에서 2003년 이후 좋은 평가를 받았던 시사프로그램 <똘레랑스>, <미디어바로보기> 등을 폐지했다. 이후 미약하긴 하지만 이 프로그램들을 대체할 만한 프로그램들로 시사성 교양프로그램인 <시대의 초상>, <EBS 시사, 세상에 말걸다>를 신설했다가 이마저 폐지해버린 것이다. 두 프로그램의 폐지는 EBS가 시사프로그램이나 시사성 있는 교양프로그램을 모두 폐지한다는 소문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 아닌가 한다.
EBS의 이런 태도는 공영방송의 역할을 포기하고 ‘교육’을 보조하는 방송으로 스스로를 전락시키는 것이다. EBS가 자기 정체성을 제대로 찾는 차원에서라도 <시대의 초상>, <똘레랑스> 같은 프로그램들이 가져온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평가하고, 그 의미를 이어갈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주길 촉구한다. <끝>
2007년 8월 24일
(사)민주언론시민연합 방송모니터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