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_
사법부의 <그때 그 사람들> 조건부 상영 결정에 대한 민언련 영화모니터분과 논평(2005.2.1)
사법부는 왜 '영등위' 결정을 존중하지 않나
.................................................................................................................................................
서울중앙지법 민사50부는 31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47)씨가 영화 <그때 그 사람들>(감독 임상수/제작 MK필름)의 제작사를 상대로 낸 상영금지가처분신청을 일부 인용해 영화에 수록된 다큐멘터리 세 장면(부마항쟁 시위장면, 박 대통령이 사망한 뒤 김수환 추기경의 조사낭독 장면, 박 대통령의 장례식 다큐멘터리 장면)을 삭제하지 않을 경우 영화를 상영할 수 없다는 이른바 '조건부 상영'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이 영화 시작과 끝 부분에 있는 고인의 장례식 등 다큐멘터리 장면이 별다른 설명 없이 비교적 장시간 삽입돼 상영될 경우 관객들에게 영화가 허구가 아닌, 실제라는 인식을 심어줄 소지가 있다"며 "이 부분을 포함한 영화는 고인의 인격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으므로 삭제 후 상영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MK픽처스는 "(문제가 된) 3 장면에 대하여는 무지화면으로 처리해 예정대로 상영하기로 했다.
본회는 법원의 이번 판결이 진정 21세기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단인지 의심스럽다. 이미 본회가 지적한 바 있는 것처럼 영화는 세상을 해석하고 표현해 내는 '예술의 한 양식'으로서,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한 사건이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틀에서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내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창작자의 몫이어야 한다. 또한 창작물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과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극영화에 다큐멘터리를 편집하는 형식 역시 창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달하는 적절한 방식으로 선택한 창작자의 표현의 영역으로서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별다른 설명 없이 비교적 장시간 삽입돼 상영될 경우 관객들에게 영화가 허구가 아닌, 실제라는 인식을 심어줄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삭제하라는 것은, 화가가 전체적인 구도를 설계하고 자신만의 표현법으로 완성한 미술 작품의 어느 한 부분이 관람객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특정 부분을 가리거나 잘라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만일 사법부가 예술의 내용과 형식을 따로 떼어 놓고 별개의 영역으로 판단했다면 이는 예술과 창작의 영역에 대한 사법부의 심각한 판단 오류를 드러낸 것이며, 창작물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음에도 내린 판결이라면 이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스스로 억압하는 이율배반적인 행위로, 향후 한국영화 창작에 날카로운 족쇄를 채울 수 있는 위험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편집의 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화에 있어, 특정한 장면을 삭제하라고 하는 것은 명백히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침해한 것이다.
더구나 <그때 그 사람들>은 영화상영 여부를 결정하는 정부기구인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에서 <15세 상영가>를 받은 영화이다. 이미 상영에 대한 심의를 마친 영화에 대해 사법부에서 '일부 장면 삭제' 판결을 내린 것은, 온전한 창작물에 대한 국민들의 볼 권리를 사법부가 제한하는 시대착오적인 검열 행위이다.
사법부는 영화에 먹칠을 하게 함으로써 결국 자신들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관객들은 사법부의 재단에 의해 훼손된 작품이 아닌 감독 고유의 작품을 보고 판단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이 기본적인 권리를 무시한 사법부의 판결에 따라 3분 50초 가량의 무지화면(검은화면)이 삽입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임상수 감독의 작품을 보는 것인가 아니면 사법부가 제작한 영화를 보는 것인가. 무지화면이 나오는 동안 관객들은 과연 이 나라의 창작 환경과 사법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상상해 보라. 더 나아가, 머지않아 <그때 그 사람들> 감독판과 사법부판이 시중에 나돌아 모든 이들이 두고두고 웃지 못할 이야깃거리로 남을 것이라는 걸 왜 모르는가.
예술성이든 정치성이든 영화에 대한 최종 판단은 관객의 지성과 감성에 맡겨야 하고, 그에 대한 최종 책임은 감독이 져야 한다. 그런데 아주 기본적인 이 원리를 무시하고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월권을 행사한 사법부는 이번 판결로 우리나라 영화사에 또 하나의 부끄러운 족적을 남겼으며, 이는 앞으로도 사법부의 진정한 권위와 위상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아 그 누구보다 사법부 자신을 부끄럽게 할 것이다.<끝>
2005년 2월 1일
(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영화모니터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