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_
WTO 각료회의 관련 신문보도에 대한 민언련 논평(2003.9.17)
등록 2013.08.07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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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 섣불리 포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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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제5차 각료회의가 14일(현지 시각) 각료선언문을 채택하지 못하고 폐막됐다.
전 한농연 회장 이경해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저항할 만큼 이번 각료회의는 우리 농업의 사활이 걸린 농업개방 문제를 다뤘다.
그러나 이번 회의를 보도하는 우리 신문의 태도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한마디로 WTO 체제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의 강조'였다.
특히 현지시각으로 13일 각료회의가 선언문 초안을 내놓자 15일자 조간신문들은 일제히 각료선언문 채택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기사를 내보냈다. <농산물 대폭개방 불가피>(중앙 조선 1면), <농산물 큰폭 개방 불가피>(한겨레 1면) <전면 시장개방 불가피…추곡수매제 없어질듯>(동아 1면 작은제목) 등 1면 기사들의 제목들만 봐도 이러한 경향이 쉽게 드러난다.
한겨레는 사설 <칸쿤 회의의 경종>에서 "칸쿤회의는 농산물 관세를 대폭 인하할 것을 명시한 선언문을 채택하고 폐막했다"고 오보를 내기도 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개도국 재인정' 여부가 이번 각료회의에서 결정되는 문제가 아님에도 3면 기사 <한국 '개도국 재인정' 물건너간듯>을 통해 우리나라의 개도국 지위 인정이 '물건너간 듯한 분위기'라고 보도했다. 또 조선일보는 관련기사 <"우리 주장 초안에 반영안돼">를 통해 황두연 협상대표가 "개도국 지위 유지에 여전히 집착을 보인다"며 개도국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쓸모없는 양 치부했다.
WTO 체제의 확대 강화가 쉽게 거스르기 힘든 세계적 추세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또 각료선언문 초안이 채택될 가능성이 높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WTO에 반대하는 NGO들의 격렬한 투쟁과 자국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선진국-개도국 사이의 갈등이 빚어지고 있던 상황에서 선언문 초안을 근거로 농업개방의 불가피성부터 들고나온 것은 '너무 일찍 포기하는' 태도일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각료선언문 채택이 결렬된 이후 이를 보도하는 신문들의 태도다. 대부분 신문은 '각료선언문 채택 결렬이 도하개발의제(DDA) 농업 협상의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농업개방의 불가피성과 그에 호응하는 농정, 즉 경쟁력 강화와 농업분야의 구조조정을 강조하고 나섰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동아, 중앙 등이 이와 같은 보도 경향을 강하게 나타냈다.
특히 조선일보는 16일 <WTO '칸쿤 선언문' 채택 실패-12월 이전 재협상…美 EU 농산물개방 사실상 합의>(2면 기사) <농업개방 현실 인정하고 살 길 찾아야>(사설), <농업개방 태풍 어쩔건가>(시론)를 통해 농업개방의 불가피성, WTO 체제의 인정, 시장지향적 농정을 주장하고 나섰다.
조선일보는 "선진국과 개도국 모두 농업 시장을 대폭 개방한다는 각료선언문 초안 내용이 앞으로 협상 과정에서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농업 개방은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국 농업이 살 길도 찾을 수 있다.…정부가 '개도국 지위' 같은 헛된 구호로 농민들을 속이는 한 한국 농업의 미래는 없다"며 농업개방에 대한 최소한의 자구 노력을 비웃었다.
15일 사설에서 다자 양자 협상에서 개도국 지위 확보에 협상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중앙일보는 16일 사설 <칸쿤 결렬, 개방압력 더 거세질 수도>에서 개도국 지위 확보에 비관적인 견해를 보이며 '획기적인 구조 조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또 4면 해설기사에서는 "내년에 시작될 쌀 시장 개방협상을 감안하면 이번에 협상이 타결되는 편이 한국으로선 더 유리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도 같은 날 사설 <칸쿤협상 결렬 이후가 더 어렵다>를 통해 협상 결렬로 쌀 협상이 더욱 어려워졌으며, 농업의 획기적인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무역의존도가 70%에 이르는 우리에게 WTO가 주도하는 자유무역질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정부는 WTO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나 '한국은 반(反) WTO국가'라는 국제사회의 인식이 확산되게 내버려 둬서도 안된다"며 WTO체제의 대한 '국민적 순응'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들 신문은 이번 회의에서 각료선언문이 채택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도 '싱가포르 이슈'를 둘러싼 선진국-개도국의 이견을 중심에 두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부 언론에서는 '싱가포르 이슈'는 표면적 이유이며 이면에 '농업 보조금' 문제에 대한 이견이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경우도 협상 결렬의 원인이 '농업보조금' 문제에 있었다는 분석을 실어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한편 이번 각료회의에서는 과거보다 커진 개도국들의 영향력과 반세계화 NGO들의 영향력이 선언문 채택 결렬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 신문들은 WTO 체제가 대세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만 급급한 모습이다. 경향신문은 농업 개방의 압력은 여전하지만 이번 협상 결렬로 얻은 시간적 여유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 다른 신문들과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책 마련에 있어서는 경향이나 한겨레 모두 다른 신문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WTO 체제에 맞서 우리 농업을 지킬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는 일은 난제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개방 불가피론'만을 내세우는 것은 책임있는 언론의 자세라고 볼 수 없다. 우리는 수구언론이 친자본적인 시각에서 강조하는 '개방 대세론'이나, 초국적자본이 주도하는 세계화는 나쁘지만 저항할 수도 없다는 '비관적인 불가피론' 모두 경계해야 할 태도라고 본다.
우리는 언론들이 WTO의 협상 일정을 앞지르는 보도까지 내보내 농업 개방을 기정사실화할 것이 아니라 농민 보호와 식량주권 차원에서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신중하게 접근해줄 것을 촉구한다.

 
 

2003년 9월 17일


(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