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은 안드로메다 은하가 우리 은하에 속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천문학자들이 우리 은하 밖의 은하는 존재하는지, 우리 은하가 우주의 유일한 은하이고 그 중심에 태양계가 있는지를 두고 끝장 토론을 벌인 것이 그로부터 불과 4년 전이었다(새플리-커티스 대논쟁). 이어서 허블은 모든 은하가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점을 밝혀내 항상 자신들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길 좋아하는 인류의 오만함을 산산조각 냈다. 이 사실을 밝혀낸 논문 ‘외부은하의 거리와 시선방향 속도 간 상관관계’의 길이는 고작 6페이지였다.
러시아 수학자 그레고리 페렐만(Grigori Perelman)의 2002년 ‘푸앵카레 추측 증명’ 논문은 누구나 논문을 올릴 수 있는 오픈 액세스 저널인 arxiv.org에 출판됐으나 수학계를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전 세계 수학자들은 3년간 이 논문을 검증해 틀림이 없다는 것을 밝혀냈다. 푸앵카레 추측은 3차원 공간에서 모든 단일한 닫힌 곡선이 한 점으로 모일 수 있으면 그 공간은 구형과 같다고 칠 수 있다는 내용의 추측인데, 100년간 풀리지 않아 ‘세계 7대 난제’로 알려져 있었다. 푸앵카레 추측은 우리 우주 안에서 우주의 전체 모양을 알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논문의 사전적 정의는 ‘대학에서 학위를 받기 위해 제출하는 긴 글’(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다. 하지만 논문은 진정한 연구자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단순히 문자의 나열이나 졸업요건, 또는 학문적 성과 이상의 무언가이다. 좋은 연구자가 장시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주장과 근거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투고 후 철저한 학계의 상호 검증을 거친 논문은 허블의 논문이 그랬듯 단 몇 페이지의 글로 수천 년간 형성된 단단한 사고방식조차 부수고 인간의 상상력을 450억 광년이 넘는 우주의 가장자리까지 데려다줄 수 있다.
이런 논문의 가치와 연구 윤리의 중요성을 대중들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논문 검증은 정관계 인사 검증의 중요한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조국 전 법무장관은 ‘자녀 제1저자’ 논문이 여론 악화의 치명적인 계기가 되어 몰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항마로 유명세를 얻어 법무장관을 차지한 한동훈 장관의 자녀도 역대급 논문 다작 작가로 드러났다. 한동훈 장관은 ‘누구나 올릴 수 있는 오픈 액세스 저널에 실린 4~5페이지 분량의 에세이’라는 허블과 페렐만의 양 뺨을 날리는 명언을 남기며 빠져나갔다. 현 윤석열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 씨의 2008년 국민대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박사학위 논문은 제목부터 ‘회원 유지’를 ‘member Yuji’로 번역해 세간의 웃음거리가 됐다. 표절 프로그램 기준 해당 논문의 표절률은 40%를 넘었다. 그러나 논문 검증의 책임을 맡은 국민대는 의아하게도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최근 벌어진 한동훈 자녀 논문 논란과 김건희 씨의 ‘Yuji’논문 사건은 논문 표절이나 저자 끼워 넣기 같은 여느 흔한 연구 윤리 위반 사건과는 궤를 달리한다. 대학 당국 뿐 아니라 교수회에서까지 김건희 씨 논문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국민대의 결정은 논문의 학문적 권위를 보증하는 핵심인 사후검증 과정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논문을 논문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한동훈 법무장관의 궤변은 어떤 연구 윤리 위반이든 ‘논문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기만 하면 도마뱀 꼬리 자르듯 빠져나갈 길을 열었다. 조국 법무장관 사건 당시 이재정 교육감이 조 장관 자녀의 논문은 ‘에세이’라며 문제없다고 했다가 맹비난을 받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지독한 내로남불이다.
앞서 세상을 바꾼 위대한 논문들을 소개했지만, 논문 그 자체를 절대시 할 필요는 없다. 논문의 권위는 내용의 위대함보다는 논문이 잘못되었을 때 어떻게 바로잡는지에 달려있다. 아무리 공을 들였더라도 인간이 하는 일이니만큼 주장이나 근거가 틀릴 수도 있고, 각종 양식이나 인용 표시도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영향력 있는 학술지에서는 동료 평가(peer review)부터 시작해 연구 윤리 위반이 밝혀지면 논문을 철회하는 등 철저한 품질 관리를 한다. 연구 윤리 위반이 밝혀졌을 때 스스로 바로잡는 노력도 중요하다. 대선 전 이재명 대통령 후보자는 가천대 석사학위 논문에서 인용부실이 밝혀지자 논문 철회를 요청했지만 가천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천대 조사 결과 이 논문의 표절률은 프로그램 기준 24%, 정성평가 결과 10% 미만이었다. 비록 선거를 앞두고 한 일이어서 진정성은 의심되지만, 논문을 에세이라고 지록위마하는 대신, 각종 의혹으로 시끄러운 와중에도 두더지처럼 비공개 일정을 이어가는 대신 이처럼 뭐라도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닐까.
공시형 기획팀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