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자유 너머, 민주적 공론장을 위하여
채영길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장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언론의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굳은 신념과 실천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언론자유를 위해 해직과 투옥을 감수한 언론인들의 숭고한 헌신 속에 서 태어난 민언련은 정치와 자본의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며 대안언론을 설립 하는 데 앞장섰고, 민주화 이후에는 권력화된 언론을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해 왔습 니다. 한국 언론운동의 역사는 곧 민언련의 역사였고 민주주의의 변곡점마다 민언련이 함께했습니다. 민언련과 든든한 시민들이 있었기에 한국 민주주의는 발전해 왔습 니다. 그렇게 지난 40년간 언론자유와 민주주의 발전에 헌신해 온 민언련의 역사는, 우리 민주주의의 발전 그 자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오해였음을 말입니다. 군부 독재의 언론장악과 탄압으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 민주주의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 집니다. 언론인을 압수수색하고 기소하며 공영방송을 수시로 권력의 하수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언론이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끌어 줄 것이라는 희망은 막연한 기대에 불과했고, 언론권력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 요구가 더 나은 언론제도 와 실천을 가져오리라는 믿음은 지나치게 성급했습니다. 자유언론운동을 이끈 해직 언론인들이 몸담았던 언론사들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 언론시장과 자유를 독점하며 사실상 국가 권력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민중언론이었던 『말』지는 상업언론 시장을 넘어서지 못했고, 『한겨레신문』이 민주주의 심화의 구심점이 되어주길 바랐던 기대 마저 불투명해 보입니다. 언론에 대한 비판은 무기력해지고, 언론개혁은 언론 자체 를 위한 개혁일 뿐,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와는 무관하다는 냉소가 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언론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민언련에 대한 시민의 지지와 연대가 강화되었다고 확신하기도 어렵습니다. 회원 수가 줄어드는 추세는 되돌리기 힘들어 보이며, 각자의 신념과 가치에 따라 언론·시민·사회의 연대는 더 이상 당연하지도, 쉬운 일도 아닙니다. 대학과 학계 역시 언론과 민주주의에 대한 진보 적 대안을 제공하기보다는 언론자본과 시장에 포섭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 다. ‘민중의 주체적 각성과 힘’으로 출범했던 40년 전과 현재의 민언련은 40년이라는 시간적 간극만큼 저기 멀리 떨어져 있는 듯이 보입니다. 창립 40주년을 맞은 민언련은 분명히, 정치·사회·경제적 도전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민언련은 도래하는 40년에 대한 가능성의 담론과 실천 대안을 제시해 야 합니다. ‘민주적’이라는 것에 대한 강렬한 열정으로 단지 언론이 아닌 그 너머 ‘민주’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을 실현하려는 의지로 민언련은 앞으로 도래할 40년 을 맞이해야 합니다. 지난 40년을 되돌아보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40년을 위한 희망과 비전을 함께 공유할 때 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1984년 12월 19일,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창립선언문에서 규정된 언론의 정의는 민언련이 추구해야 할 핵심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선언문에 따르면 “언론이란 더불어 나누는 말이며, 밝힘이며, 사회 적 인식의 수단이며, 의지를 공유하게 하는 유대의 끈이며, 자유의 무기이며, 궁극적으로는 인간 해방 의 고귀한 열쇠”가 되어야 한다고 명시하였습니다. 기성 언론에 대한 불신과 자신이 신뢰하는 정보에 대한 의존으로 인해 시민들의 발언과 논의는 더 이상 사회적 인식을 함께 나누는 장으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시민들의 언(言)과 론(論)은 시민 서로의 의지를 공유하고, 유대와 자유 및 해방을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며, 오히려 이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언론은 단순히 정보의 전달과 공유가 아니라 시민들이 함께 소통하며 서로에 대한 인식을 통해 사회적으로 의 지를 확인하고 공유해야 합니다. 민언련은 언론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시민들의 억압적 요소를 공동으 로 극복하는 데 기여하는 매개체로 기능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전을 바탕 으로 언론의 역할을 재구상해야 합니다.
언론을 넘어 시민들의 언론 공론장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은 이제 필수적입니다. ‘민중의 주체적 각 성과 힘’이 억압된 현재의 공론장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해야 합니다. 언론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면, 언론의 조직과 운영 역시 사회적 소통이 가능하게 조직되어야 하며, 언론이 민주주의의 기초라 면 그 운영 방식도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언론은 시민들의 평등한 참여와 숙의 과정을 내부적으 로 활성화함으로써 재구성되어야 합니다. 모든 시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미디어에 ‘참여’하고(단순 접근과 이용이 아니라), 이를 통해 정보와 지식을 사회적으로 만들며(사회적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는 것 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타인과 직접 소통할 시민 기본권으로서의 권리(소통을 매개해야 할 언론사의 책무가 아니라) ‘미디어 기본권’의 실현을 민언련이 추구하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비 롯합니다. 언론자유와 공공성은 언론의 책무도 본성도 아니며 언론 민주화의 결과가 되어야 한다는 인 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정보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것을 넘어서, 시민이 미디어를 통해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사회적 의사소통 과정에 주체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권리로 확대됩니다. 민언련 은 이러한 미디어 기본권이 보장될 때 비로소 민주적 여론 형성과 사회적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주 장하며, 이를 위한 제도적 보장과 시민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권의 무도한 언론탄압과 공영방송 장악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80년대로 후퇴했다고 합니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 말입니다. 40년 전 우리에겐 해직과 투옥을 감내할 지식인과 언론인이 있었고 무엇보다 ‘민중의 주체적 각성과 힘’을 조직해 낼 공동의 해방 의지와 유대가 있었습니다. 억압의 조건은 그래서 40년 전보다 더 냉혹합니다. 더 냉혹한 억압의 현실에서는 더 해방적인 이념과 실천을 강구해야 합니다. 다시, ‘민주적’이라는 것에 대한 강렬한 열정으로 단지 언론이 아닌 그 너머 ‘민주’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을 실현하려는 의지, 그 의지로 민언련은 앞으로 도래할 40년을 맞이해 야 합니다. 언론자유를 넘어 공론장의 민주화를 위한 40년의 길을 함께 내디뎌 주실 것을 희망합니다.
▼날자꾸나 민언련 2024년 겨울호(통권 229호) PDF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