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_
대법원이 ‘종북 마녀사냥’을 허용하기 시작했다사법부가 언론의 혐오 표현을 민주주의 사회의 합리적 의견 제시 정도로 인정한 충격적인 판결이 나왔다. 지난 12월 12일, 대법원은 우리 단체를 ‘종북세력 5인방’, ‘대한민국 안보를 해치는 선전·선동을 해온 단체’라고 규정한 채널A 및 패널 조영환 씨를 상대로 우리 단체가 제기한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 원심은 채널A 및 조영환 씨의 명예훼손 책임을 인정하여 민주언론시민연합(이하 민언련)에 각각 1,000만 원씩 지급하고 정정보도문을 게시하라고 판결한 바 있다. 대법원은 채널A 등이 민언련에 가한 표현들이 ‘사실 적시’가 아니라 민주 사회에서 용인되는 ‘의견의 표명’이므로 명예훼손이 아니고, 민언련은 공인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러한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며 판결을 뒤집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종북’이라는 공격이 이뤄지는 맥락과 목적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방치한 판단으로서, ‘종북’을 포함한 혐오 표현을 사법부가 용인해준 것이나 다름 없는 퇴행적 판결이다. 그동안 무분별한 ‘종북’ 표현이 명예훼손이자 인격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다수 내려져 왔음에도, 대법원이 최근 이를 잇따라 뒤집고 있는 상황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언론이 반공인사 데려와 시민단체에 허위사실 유포했는데 문제가 없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 단체를 모욕한 주체가 채널A, 즉 대형 언론사라는 점이다. 영향력이 큰 매체로서 기본적인 객관성, 공정성은 물론, 민주적 소양을 갖춰야 하는 채널A가 종북좌익척결단 대표(조영환)라는 정체조차 불분명한 인사를 출연시켜 보도·시사 프로그램에서의 비평을 맡긴 것 자체가 상식에 벗어난 일이었다. 채널A는 우리 단체를 한국진보연대, 우리법연구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통합진보당과 묶어 <대한민국의 종북세력 5인방>으로 규정한 표를 보여줬고 무려 “긴급진단 종북세력 5인방”이라는 주제로 대담을 했다. 채널A가 이렇게 판을 깔아주자 조영환 씨는 “미군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연방제 통일…효순이 미선이 사건으로 부각…광우병 촛불 폭동…반란 폭동을 일으킬 때에 그 사상을 기반으로 행동…과격과 반란” “민언련이 왜 줄기차게 송두율과 강정구를 보호하고, 국보법 철폐를 선동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선동하는지 누가 그런 오리엔테이션을 주는지 수사를 해야한다”, “우리나라의 안보를 해치는 일련의 선전, 선동을 민언련이라는 단체에서 줄기차게 해왔기 때문”, “민언련은 종북세력의 선전선동수단이 아니었는가하고 국민으로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등 무분별한 비난을 가했다. 우리 단체를 단순히 ‘종북’으로 의심한 것이 아니라, 채널A라는 방송을 통해 허위사실을 근거로 모욕과 혐오를 드러낸 것이다. 채널A 역시 단지 발언 기회를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종북 선동하는 언론 ‘민주언론시민연합’> 등의 자막으로 적극 가담했다.
언론이 근거 대면서 비방해도 대법원은 ‘사실 적시 아닌 단순 의견 표명’
이는 모두 허위사실을 기반으로 한 심각한 명예훼손이다. 민언련은 언론 비평과 시민언론운동을 하는 단체로서 국가보안법, 주한미군 등과 관련된 언론 보도를 비평했지 주한미군이 철수해야 한다거나 ‘연방제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 바가 없다. 더구나 그런 주장을 했다고 해도 그것이 대한민국의 안보를 해치고, 심지어는 ‘누군가 오리엔테이션을 주는 종북 선전수단’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원심에서는 이를 주목하여 채널A와 조영환 씨의 주장이 “구체적인 사실의 적시 또는 사실적 주장에 해당하고…(중략)…허위사실로 원고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채널A와 조영환 씨의 주장이 ‘사실 적시’에 따른 입장 표명이라는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판결문에는 이 사건의 피고가 객관성·공정성에 있어 막중한 의무를 지닌 언론사라는 고려도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대법원은 “자신들이 의미 있다고 주목하였던 나름의 몇 가지 사정에 근거하여 원고가 그동안 취해 온 행보나 정치적 입장 등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비판하기 위한 것으로 이를 사실의 적시로 평가하기 보다는 의견의 표명이라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이 문장 자체가 모순이다. 피고들이 ‘몇 가지 사정’을 ‘근거’로 들었다면 기본적으로 ‘사실 적시’에 따라 발언을 한 것인데 어째서 ‘사실 적시’의 성격을 모조리 배제하고 오로지 순수한 ‘의견 표명’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더구나 이번 사건은 개인 간의 다툼이 아니라 대형 언론사, 그것도 영향력이 막대한 기득권인 채널A가 시민단체를 향해 공격을 가한 것으로서 언론의 책임성 및 자격, 보도윤리가 모두 걸린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법원의 판단대로라면 기준이 뭔지 알 수도 없는 ‘사실 적시’에 해당하지 않는 ‘몇 가지 사정’만으로 언론이 누군가를 향해 ‘종북’ 등 모욕을 퍼부어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게 된다.
혐오 표현인 ‘종북’ 허용한 대법원, 되살아난 ‘반공주의 망령’
또 하나 이번 대법 판결에서 우려되는 지점은 ‘종북’이라는 표현이 우리 사회에서 강력한 배제의 기제이자 ‘반국가·반사회 낙인’으로 작동한다는 사실, 즉 그것이 일종의 혐오표현이라는 사실을, 우리 사회의 최종심급인 대법원에서 부인해버렸다는 것이다. 판결문을 보면 대법관들이 과연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는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운 대목들이 많다. 대법원은 “극우든 극좌든 보수우익이든 종북이나 주사파든 그 표현만을 들어 명예훼손이라 판단할 수 없다”고 적시했는데 ‘보수우익’의 반대급부로 ‘종북·주사파’를 든 것 자체가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아직도 대법원이 반공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보수우익’의 반대는 ‘진보좌익’이며 누군가를 ‘진보좌익’이라고 해도 명예훼손이 되지는 않는다. ‘종북·주사파’는 ‘보수’의 반대말도 아니고 그 의미는 단순히 ‘북한 체제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을 넘어 우리 사회의 공론장에서 배척되어야 할 존재, 더 나아가 법적으로 처벌받아야 할 ‘반사회적 존재’로 통용된다. 실제로 보수 정치세력과 보수언론은 반대파를 공격하거나 정당성을 훼손하기 위해 늘 ‘종북 프레임’을 악용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그러한 ‘종북 프레임’을 법 체계에서 인정하고 ‘종북’을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버젓이 살아있는 지금, 사법부가 ‘종북 프레임’을 용인한다면 ‘마녀사냥’을 허용하는 꼴이나 다름 없다.
사실관계 파악하고도 ‘관대한 해석’ 해준 대법원, 의도 있나
이 부분에 있어 대법원 스스로 노출한 모순이 또 있다. 판결문에서 대법원은 “강길모는 ‘종북은 말 그대로 북의 김씨 권력에 추종하는 그들의 이해관계를 철저하게 대변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로 요즘은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발언했다”고 사실관계를 확인하고도 “종북이라는 표현은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국가 반사회 세력이라는 의미부터 북한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에 대하여 비판적 견해를 보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면서 ‘종북’ 표현이 명예훼손이 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사건의 방송 중 또 다른 패널인 강길모 전 한나라당 부대변인이 ‘종북’의 의미를 어떻게 쓸 것인지 못 박았고 이를 대법원이 확인하고도 ‘종북의 의미는 광범위하니 명예훼손이 아니다’라는 판단에 도달한 것이다. 이쯤되면 대법원이 사건의 경위 및 사실관계를 토대로 판결을 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대법관들의 뇌리에 박혀있는 반공주의가 미리 정해놓은 답대로 판결을 한 것인지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공인’이 혐오까지 감수해야 하는 건 아니다
마지막으로 대법원이 채널A의 명예훼손 혐의를 인정하지 않은 이유 중 ‘민언련은 공인이기 때문에 종북과 같은 비판도 감수해야 한다’는 대목도 납득하기 어렵다. 대법원은 민언련이 “언론과 관련한 일반 국민의 관심 사안에 관하여 오랜 기간 꾸준히 입장을 밝힘으로써 공적토론을 제기하거나 참여”했기 때문에 “언론이나 타인으로부터 공적인 반응이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하고, “다양한 관점에 기초한 광범위한 문제제기가 허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민언련이 시민단체로서 여러 사회 논쟁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북’, ‘안보를 해치는 단체’와 같은 근거 없는 비방까지 감수해야 할 이유는 없다. 채널A와 그 패널들이 내뱉은 발언이 ‘다양한 관점에 기초한 문제제기’가 아닌 혐오표현에 불과하다는 점은 재차 설명할 필요도 없다. ‘공인’이라 하더라도 보호받아야 할 사적 영역과 인권이 있으며 바로 사법부가 그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 최후 보루다. 혐오 표현이나 다름 없는 ‘종북’을 사회적으로 용인한 이번 대법 판결이 과연 그러한 사법부의 역할과 합치하는지 성찰해보길 바란다.
지금까지의 판결 뒤집기 시작한 대법원, ‘표현의 자유’ 오남용은 아닌가
사실 지금까지 법원은 ‘종북’ 표현이 명예훼손 또는 인격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판결해왔다. 놀랍게도 최근 대법원에서 잇따라 그러한 종전의 판례를 뒤집고 있는 것이다. 극우인사 변희재 씨가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의원 부부를 향해 “종북주사파, 종북파의 성골” 등의 비난을 가한 데 대해 1, 2심은 명예훼손 책임을 인정했으나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9월, “정치적 표현에 의한 명예훼손 등 불법책임을 인정하는 데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이유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11월 20일에는 박상은 전 새누리당 의원이 임수경 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에 “종북의 상징” 등의 비방을 가한 사건에서 인격권 침해를 인정했던 원심 역시 대법원에 의해 깨졌다. 최근들어 대법원이 ‘넓게 보장되어야 하는 표현의 자유’를 ‘배타적 혐오 표현’까지 정당화하는 도구로 해석하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판례를 관행으로 확정지어 현재 사회적 논의가 진행 중인 ‘혐오 표현 규제’를 애초부터 불가하게 매듭짓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이번 판결에 참여한 주심 김상환 판사, 안철상·박상옥·노정희 대법관들에게 묻는다. 이번 판결이 진정 ‘언론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를 제대로 구현했는가? 오히려 그 가치들을 오남용하여 명예훼손 피해를 호소하는 시민들이 민사 영역에서조차 ‘혐오’를 감수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2019년 12월 18일
(사)민주언론시민연합 (직인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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