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_
대법원의 <백년전쟁> 판결, 심의제도 재검토의 계기로 삼아야지난달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의 <백년전쟁>(감독 정지영)에 대한 법정제재 처분이 위법하다고 최종 판결했다. <백년전쟁>은 시민단체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다큐멘터리로, 시민방송RTV에서 방송되었다. 2013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통심의위)는 이 방송에 법정제재인 ‘관계자 징계 및 경고’를 의결했고 이를 방통위가 확정해 제재처분하자 시민방송RTV는 불복해 소송에 나섰다. 1, 2심 재판부는 방통위 징계가 정당하다고 판결했으나, 대법원은 치열한 논의 끝에 1,2심 결과를 뒤집었다. 대법관 7명이 방통위의 법정제재가 부당하다고 봤고 6명은 정당하다고 봤다.
<백년전쟁>에 가해졌던 ‘법정제재’, ‘정치심의’의 결과
재판의 발단이 된 2013년 방통심의위의 <백년전쟁> 심의는 그 당시부터 ‘정치심의’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당시 상황은 이렇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정권 차원의 공영방송 장악이 자행되면서 KBS‧MBC가 노골적으로 이승만‧박정희 두 인물의 친일 행적, 사법 살인, 철권통치 등 치부를 은폐하고 칭송 일변도의 방송을 하고 있었다. 방통심의위는 MBC <PD수첩> 광우병 편, KBS <추적60분> 천안함 의혹 편 등 정부 비판적 프로그램에 잇따라 ‘법정제재’를 가하면서 이미 방통심의위가 정치권력에 포섭된 상황이었다. 이렇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올바른 역사 인식을 위해 시민사회가 나서야 한다는 요구가 컸고 시민단체가 여러 학자들과 뜻을 모아 만든 것이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이었다.
당시 심의위원들은 객관성‧공정성으로 법정제재를 내렸지만 그들의 발언은 해당 조항과 무관할 뿐 아니라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여당(당시 새누리당) 추천 심의위원은 “대한민국 정통성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저주의 역사관을 심어주는 해악 프로그램”(엄광석), “음란물만 문제가 아니고 역사를 객관적으로 조명하지 않은 것도 유해한 프로그램”(박성희) 등 비난을 가했다. 심지어 “이 다큐를 제작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일관되게 건국의 정통성을 부인해왔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했고 한미FTA를 반대한 단체”(권혁부)라며 느닷없이 시민단체를 공격하기도 했다. 심지어 의견 진술을 위해 출석한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을 향해 “천편일률적으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얘기만 하는 편협한 사람으로부터 진술을 들을 필요가 있냐”며 힐난하기도 했다. 심의가 이성적 결정이 아닌, 정답을 정해놓고 내린 ‘정치심의’에 가까웠던 것이다.
재차 반복된 객관성‧공정성 논쟁, 핵심은 ‘균형성’의 기준
이번 판결의 핵심 쟁점은 ‘백년전쟁’이 객관성‧공정성 심의규정을 위반했는지 여부였다. 제재가 정당하다고 본 소수의견은 ‘백년전쟁’ 제작진이 자신의 의도대로 근거들을 선별했으며 그 목적이 사자에 대한 모욕과 조롱이므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봤다. 이승만‧박정희 두 인물의 역사적 평가와 무관한 개인의 사생활 등을 나열하여 정치적 과오에 대해서도 조롱과 모욕, 희화화로 일관했다고도 지적했다.
그러나 객관성‧공정성 여부에 있어 제재가 위법하다고 본 대법원 다수의견은 ‘백년전쟁’이 이승만‧박정희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논쟁 과정에서 그들에 대한 재평가와 비판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며, “외국 정부의 공식 문서와 신문기사, 관련자 및 전문가와의 인터뷰” 등 객관적 근거들을 제시했으므로 그 해석에 있어 다소 진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사실로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고, 역사적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수준이라 판단했다.
이러한 첨예한 대립은 백년전쟁 내용보다 이승만·박정희 두 인물을 놓고 오랫동안 이어진 역사적 논쟁의 반복에 불과하다. 이보다는 이번 판결문에서 공정성 판단 기준인 균형성의 개념을 재정립하고자 한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수의견의 대법관들은 “제작 의도와 다른 의견을 전혀 소개하지 않았다”면서 ‘양적 균형’을 잃은 것을 중대한 제재 사유라고 주장했으나, 다수의견은 달랐다. 다수의견은 “‘균형성’이란 각각의 입장에 대하여 시간과 비중을 균등하게 할애해야 한다는 양적 균형이 아니라 관련 당사자나 방송 대상의 사회적 영향력, 사안의 속성, 프로그램의 성격 등을 고려하여 실질적으로 균등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공평하게 다루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이는 30년 전 언론 자유가 제한적이던 시절 만들어진 ‘공정성 조항’에 따라 ‘기계적‧양적 균형’으로 방송의 균형성을 판단하는 심의가 얼마나 부적절한지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독재 정권의 개입으로 편파 왜곡 보도가 난무하던 시절 최소한의 기계적 균형이라도 맞추라 했던 요구가 반영된 공정성 개념을 지금 민주화된 사회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실질적 공정성, 실질적 균형을 고민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방송 공정성 심의 제도’ 재검토해야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엄혹하고 부당한 심의결과에 불복하여 3심까지 재판을 진행해온 시민방송RTV의 지난한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시민이 만드는 저널리즘’의 가치를 인정하고 실질적 의미의 ‘공정성’과 진정한 의미의 ‘표현의 자유’를 인정한 대법원의 판결 취지도 환영한다.
<백년전쟁> 판결은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현재와 같은 공정성 심의 방식이 적절한 것인지 묻는 성찰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대법원도 이번 재판 과정에서 한국의 심의기구, 즉 방통심의위가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했음을 우려했다. 방통위의 제재가 부당하다는 다수의견에 섰던 김재형 대법관은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지 않는 행정기관이 방송심의제도를 통하여 방송의 공정성을 강제하는 것은 방송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보충의견을 남겼다. 이는 방송 공정성 심의가 적절한지 따져보기에 앞서 심의를 하는 기관이 일단 정치적으로 독립성을 확보해야 함을 확인한 것이다.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는 동시에 언론개혁이 화두로 떠오르는 지금 이른바 ‘가짜뉴스’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정치적 의사 표현이나 해석‧의견과 무관한 ‘혐오표현’의 제재 방식은 무엇인지, ‘표현의 자유‧언론의 자유’를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지, 근본적인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한국의 심의제도에 전반에 대한 평가와 함께 심의제도 개선 및 심의기구의 독립성 확보를 위한 논의에 임해야 할 때이다.
2019년 12월 11일
(사)민주언론시민연합 (직인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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