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는 여행] 만리타국의 신문들에게서 용기를 얻었다(2013년09호)
등록 2013.10.0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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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타국의 신문들에게서 용기를 얻었다

- '신문 오덕후'의 유럽신문 기행

 

김정현 회원 l jhkim33770@gmail.com

 

 

유럽에도 ‘벼룩시장’이 있다. 유럽 하면 고급을 먼저 떠올리는 데 비해 생소한 이미지다. 하지만 대도시의 마켓은 사람들에게 ‘필수’ 관광코스다. 런던의 버로우(Borough Market) 식료품 시장, 빈티지 벼룩시장 포토벨로(Portobello), 노팅힐(Notting Hill)이 유명하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교환학생 모임 중에도 ‘시장 덕후’가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말라가에도 벼룩시장이 있다고 했다. 부활절 방학 때 런던에서 그 맛을 톡톡히 본 지라 한창 자야 할 주말 아침을 벼룩시장에 헌납하기로 했다.


벼룩시장의 장점은 손에 꼽기도 힘들다. 그 나라에서 나는 생산물을 값싼 가격에 만나볼 수 있다는 근본적인 존재론은 기본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식으로 장사를 하는지 원초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다. 내 경우는, 한국은 고사하고 스페인 내에서도 구하기 힘든 기상천외한 물건을 구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런던에서 버로우 마켓을 갔을 때, 악명 높은 영국의 전통 내장탕인 해기스(Haggis), 순대 격인 블랙 푸딩(Black pudding)를 구했다. 세상의 모든 음식을 다 먹겠다는 나름의 포부가 있어서다. 민박에서 맛을 보고 결국 다 버려버렸지만, 당시에는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말라가 벼룩시장에서 내 관심을 끈 건 60년이 된 ‘ABC’ 신문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1946년 6월 6일에 나왔다고 적혀 있었다. 습기를 머금어 황토빛을 먹고 고풍스러운 펄프 향기가 느껴졌다. 그동안 파손된 지면이 하나 없어서 상품가치도 있었다. 새로 나온 아이돌 앨범 보는 것 마냥 좋아하는 날 보고 친구들이 혀를 찼다. “너 답다”고.


ABC 신문은 지금까지 발행되며, 최근 창간 110년을 맞았다. 타블로이드 판형이지만 정론지를 지향하는 이 신문에 관심을 가진 건 가판대에서 확 튀는 지면 편집 때문이다. 한국 일간지 중에서는 한겨레 토요판이 커버스토리로 상단 통면 사진을 배치하는 시도를 처음 했다. ABC는 타블로이드 1면 전체를 그날의 탑 스토리 사진으로 도배한다. 혹은 삽화를 싣기도 한다. 스페인 신문의 양대 산맥 <El mundo>, <El Pais> 사이에서도 눈에 두드러진다.


그럼 46년판은 어떨까. 놀랍게도 똑같았다. 독특한 1면 편집은 이 신문의 전통이라는 걸 알았다. 한때는 신문에 사진을 싣는 걸 죄악시하는 시대가 있었다고 들었다. ABC는 시대를 얼마나 앞서간 걸까. 물론 1면 이후부터는 사진보다 글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럼에도 그런 1면이 당대에 어디 있었던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 시절에도 이념적인 측면보다 독자들의 ‘욕망’을 정확히 뚫어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가끔 신문을 구하러 가판대를 간다. 버스정류장 앞엘 보면 음료수와 관광 상품 일체와 함께 신문들이 늘어서 있다. 스페인 국내 신문뿐 아니라 외국의 신문도 판다. 말라가는 독일 관광객이 많아 독일어 신문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놀랍게도 일본의 <아사히신문>도 찾아볼 수 있다.


신기하게도 신문을 보다보면 그 나라의 문화를 느끼게 한다. <아사히신문>의 레이아웃은 한국의 80년대 옛날신문 같다. 내용은 읽을 수 없지만 대뜸 생각이 들었다. “이 어지럽고 고루한 걸 누가보지?” 한국과 가장 비슷한 건 독일이다. 판형이 가장 큰 대판형에 사진보다 글이 많다. 하지만 일부 신문은 사진을 크게 쓰기도 한다. 스페인은 어떨까. 대다수 유럽신문처럼 사진이 많고 베를리너 판형(<중앙일보> 사이즈)이다. 정론지를 표방하는 신문에도 성적인 광고가 1면에 작게나마 실린다. 한국과는 다른 점은 1면의 광고가 하단에 통짜로 들어가는 게 아닌, 조그마하게 들어간다.


스페인 사람들과 대화하면 성적인 농담이 타 유럽국가 친구들보다 자유롭다. 그걸 놓고 생각해보니 신문이 정확히 그 나라의 문화를 보여주는 건 아닐까 싶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신문이나 독일, 중국의 신문을 보는 순간은 즉각 거부감이 들지만, 그래도 그 나라에서는 최고 수준의 신문일 테니까 말이다.


신문이 위기라는 담론은 지배적이다. 현장의 선배 기자들은 물론 소위 ‘언론고시생’들도 무척이나 민감하다. 그럼에도 신문기자를 우선순위 선두에 두고 사는 이유도, 민언련에서 굳이 신문분과 모니터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신문 덕후’ 기질이 있어서다.


유럽의 신문들은 자기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하고 있었다. 지면이 한정돼 담기 힘든 수많은 고민과 시도가 나타났다. 난 지금도 신문기자가 될지, 방송기자나 다른 매체로 나갈지 고민한다. 하지만 유럽의 신문들을 보면서 용기를 얻는다. 상황이 어떻게 되더라도 신문은 고유의 가치가 있으며, 전통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살려나가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있을 현직 기자 내지는 민언련의 회원들도 그 중 하나일 테다. 그렇기에 신문사에 지원하기를 아직은, 포기하지 않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