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호] [특별인터뷰] ‘박박홍’이 만든 <보도지침 특별호> 그 뒷 이야기 (박성득, 홍수원, 박우정, 이석원)
등록 2016.12.20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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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지침’을 폭로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사실 ‘1986년 보도지침 폭로 사건’을 아는 사람조차 그다지 많지 않다. 그나마 사건을 아는 사람들에게도 ‘보도지침’을 누가 폭로했냐고 물으면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와 <말> 지라고 말한다. 그 정도 알면 사실 다 아는 것이다. 더는 <보도지침>을 누가 만들었는지 아는 이가 당시 관련자 이외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민언련 사무처장을 하고 있는 나도 ‘보도지침’을 폭로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제대로 모른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보도지침’ 사건의 산증인인 신홍범 선생조차도 <보도지침 특별판>을 만들고 사건을 폭로하는 과정을, 누가 어디에서 얼마나 어떻게 고생했는지 제대로 파악하시지 못한다는 것이다. 선생들의 증언을 들으면 한결같이 당시에는 자신이 하는 일 이외에는 더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혹여 잡혀가더라도 ‘불지 않으려면’ 애당초 모르는 것이 상책이기 때문이다. 그저 자기가 맡은 일만 열심히 하고, 사진 한 장도 찍지 않으며 그렇게 각자의 역할에 따라 점을 찍어 냈다. 그리고 이 점들이 모여 ‘보도지침 폭로’라는 큰 그림으로 완성되었다. 

 

민언련은 <날자꾸나 민언련> 11월호에서 한국일보 캐비닛에 보관된 ‘보도지침’을 복사해 세상에 내놓은 김주언 기자와 이를 폭로하여 ‘사건’으로 키운 신홍범 선생을 만났다. 12월에는 그들의 대화 속에 자주 등장하던 숨어있는 일꾼들. 실제 가장 열심히 일한 리더들을 만났다.  이른바 ‘박박홍’ 체제의 주인공들. <보도지침 특별판>을 만든 진짜 주역이다. 

 

박성득, 홍수원, 박우정 선생(사진 왼쪽부터)과 이들을 모신 이석원 당시 언협 사무차장(제일 오른쪽)과의 만남은 정말 길었다. 너무 길어서 네 분의 대화만 가지고도 책을 한권 쓰라고 해도 쓸 수 있었는데, 나는 그들을 보내지 못하고 계속 조르고 졸라 더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민언련 사무처장 정말 끈질기네”, “독하네”와 같은 말을 들으면서도 더 듣고 싶었던 그들의 이야기. 감동적이고 흥미진진하고 슬프고 아름답기까지 해서 덜어내기 힘들었던 그들의 이야기. 정말 힘들게 절반만 덜어서 이 지면에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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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박홍 체제’ 드디어 다 모이다

 

김언경 ‘보도지침’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인터뷰, 오늘 이 자리는 두 번째 만남입니다. 지난 번 신홍범, 김주언 선생님께서 ‘보도지침’을 만든 사람들을 알려면 오늘 모신 네 분을 먼저 만나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어렵게 모셨습니다. 박우정 이사장님은 최근까지 민언련 이사장을 맡아 오랫동안 저희에게 큰 울타리가 되어주셨기에 자주 뵈었지만요. 오늘 모신 세분 선생님을 저는 처음 뵙습니다. 박우정 이사장님도 이사장님으로만 알고 있을 뿐, <보도지침> 제작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제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보도지침>을 만들던 당시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다 듣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조금 전 한분 한분이 오실 때마다 서로를 바라보며 인사하고 반가워하는 모습만으로도 마음이 찡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만나보신 지 오래되셨죠? 

 

이석원 민언련 사무처장께서 오늘 정말 큰일을 하셨어요.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에요. 정말 ‘박박홍’(박우정, 박성득, 홍수원)이 다 한자리에 모이셨네요. 이게 도대체 얼마만인가요. 이분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분들이 아닙니다.  

 

김언경 사실 제가 전화를 드릴 때 선생님들께서 모두 머쓱해 하셔서 힘들긴 했어요. 서로 누가 나오는지 물으셨는데요. 그 과정에서 제가 전화 받으시는 선생님 본인 빼고 다 오시기로 했다고 살짝 추임새를 넣은 것은 사실입니다(웃음). 그러자 처음엔 “다 지나간 이야기, 뭐 할 이야기가 있나요. 기억나는 것도 없네요” 하던 선생님도 “그렇게 다 모여요?” 하셨어요. 이렇게 모이기 힘드신 분들이 모처럼 한자리를 하셨으니 <보도지침>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풀어주시면 좋겠습니다(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어색한 웃음이 이어졌다).

 

이석원 너무 오랜만이고 시간도 많이 지나서…. 어떻게 풀지 막막하네요. 그냥 김 처장이 취조 형식으로 질문하세요. 그러면 우리가 대답할게요.
취조 형식(?)으로 인터뷰를 시작하다

 

김언경 하하하. 그럼 처음엔 제가 취조 형식으로 여쭤볼게요. 하지만 곧 선생님들 말씀이 꼬리를 이어 나올 것이라 장담합니다. 먼저 <보도지침>이라는 자료를 입수하게 된 경위를 듣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박우정 그 대목은 아마 이석원 씨가 당사자니까 가장 소상히 알 거예요.

 

박성득 이실직고 해 봐. 이제 다 지나간 일이고 잡혀가지도 않으니 숨기지 말고 다 이야기해. 

 

이석원 날짜는 잘 기억이 안 나고요. 아무튼 김도연 씨가 보자고 해서 김주언, 김도연, 저 셋이 낮에 만났어요. 그 자리에서 ‘보도지침’을 받은 건 아니고요, 그런 게 있다는 걸 들었죠. 

 

박성득 김도연 씨가 민통련 소속이었지 아마. 

 

김언경 김도연 선생님은 민언련 창립 당시 발기인이세요. 

 

이석원 그래도 그 당시 민통련 편집실장이었어요. 아무튼 셋이 절친한 친구니까. 처음 ‘보도지침’을 보니까 너무 욕심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아이고 이거 나 주라. 나 좀 살려주라”고 졸랐죠(웃음). 김도연 씨가 해직기자들이 만든 언론단체에서 폭로하는 게 더 의미 있겠다며 흔쾌하게 양보했죠. 김주언 씨가 그걸 두 번에 나눠서 줬어요. 처음에는 복사한 것을 가져다줬지. 그런데 두 번째는 급해서 원본을 아예 들고 왔어요. 

 

김언경 그럼 캐비닛에 있는 서류철을 통째로 가지고 오셨나 봐요? 

 

이석원 맞아요. 복사하는 것도 굉장히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야. 아예 원본을 들고 왔더라고. 그때 최민희 씨가 복사를 해왔던 것 같은데, 아무튼 엄청 서둘러서 복사해서 도로 가져다 놨어요.  

 

 

언협이 ‘보도지침’ 폭로를 결정하게 된 과정은?

 

김언경 그럼 언협은 그걸 폭로하기로 바로 결정하셨나요? 폭로여부는 누가 결정했나요?

 

이석원 받아오자마자 바로 결정한 것은 아니에요. 사실은 제가 하루쯤 쥐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문화6단체’라고 해서 자주 만나던 곳이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민주교육실천협의회,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민족미술협의회가 있었죠. 당시 우리가 KBS 시청료 거부운동과 관련된 소규모 책자를 만들고 있었는데, 사실은 ‘보도지침’을 거기 부록으로 집어넣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홍수원 선배님에게 걸렸어요. 그때 “이석원이 이거 아주 흉악한 사람이네”라는 말을 들었네요(웃음).  

 

홍수원 나한테 뺏긴 거지.

 

이석원 뺏겼죠. 아니 아니에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걸 가져온 당일 뺏겼을 거예요. 아무튼 걸리자마자 야단 되게 맞았죠(웃음).

 

박성득 그 때 내 기억으로는 김태홍 선배하고 우리가 같이 ‘이것을 어떻게 할까. 낼까 말까, 어떻게 내느냐’, 그런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어요.

 

김언경 저는 정말 집요하게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최종 결정을 한 단위가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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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정 그게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는데, 이게 워낙 엄청난 물건이기 때문에 비밀이 중요하잖아요. 정말 극비리에 이걸 진행해야 하는데 공개적인 회의에서 논의할 순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몇 사람이 모여 구술회의를 해서 내기로 했고, 결정사항을 송건호 의장한테 보고했을 거예요. 송건호 의장은 그전에도 그랬지만 중요한 결정사항을 직접 내리기보다는 실행위원회가 결정하면 따르는 그런 스타일이셨어요. 이것도 “이런 문건을 입수해서 내기로 했다” 그러니까 동의를 하셔서 극비리에 진행이 됐죠.
이걸 가지고 공개적인 회의석상에서 갑론을박하고 그러진 않았어요. 이게 매우 중요한 역사적 문건이기 때문에 그 당시에 ‘전두환 정권의 본질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야 한다, 언협이 결성된 목표가 언론 자유인데, 이것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견이 컸죠. ‘물론 나중에 이걸 냈을 경우에 고충이 클 것이다. 언협이 사라질 수도 있는 사안이다’ 이런 걱정을 하며 신중론이나 유보론을 펴는 주장이 있긴 있었어요. 하지만 ‘이건 내자. 언협이 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래서 극비리에 작업에 들어갔죠.

 

박성득 내가 기억나는 것은 딱 하나. 홍수원 선배가 그냥 좋아 죽데.

 

홍수원 허허허.

 

박성득 이 말 없는 사람이, 즐거워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이게 뭐라고 할까. 마치 거지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금덩이를 발견한 것처럼 보였어요. 

 

이석원 흥분의 도가니였죠.

 

 

‘아래다방’의 실체는 기상청 앞 편집실

 

박우정 우리가 <보도지침>을 만들었던 그 편집실이 어디였지?

 

이석원 서대문구 기상청 근처 편집실이었어요. 

 

박우정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해요. 애초에 <말>지 편집실이 지금 내일신문 사옥 빌딩이었어요. 그 2층인가 3층에 조그마한 방 하나 얻어 가지고 거기서 <말>지 편집하고 그랬거든. 기자들이 거길 거점으로 취재도 하고. 그러다 기상청 근처에다 비밀편집실을 또 하나 얻었죠.

 

이석원 그런데 그건 <보도지침>하고 관계가 없었어요. 봄에 옮겼거든요. 

 

박성득 나도 시점은 헷갈리는데, 은평구 전철역 나오면 왜 은평구청 근처 삼거리 그 허름한 편집실.

 

이석원 그건 3차 비밀편집실이었어요.

 

홍수원 나는 전혀 모르겠네요.

 

박성득 광교 근처에도 하나 있었죠. 아이고 도둑놈들이 자기 지나간 길이 생각이 잘 안 난다더니. 왜 이리 생각이 안 나는감. 기상청 근처에도 하나 있었고. 우리가 <보도지침> 낼 때는, 그때 아마 세 군데가 있었던 것 같아요. 하나는 완전히 폐쇄한 곳이고 두 개는 분명히 남아있었어요. 그 때 우리가 “야 이거 털리더라도 2차, 3차까지 털리는 데는 좀 시간이 걸리지 않겠냐” 이런 얘기를 했던 기억나요. 분명 복수로 있긴 있었어요(웃음).

 

이석원 여기서 제가 가장 어리잖아요. 제가 가장 정확합니다. 제가 처음 언협에 들어온 게 86년 2월 말인가 그랬습니다. 왔는데 그때까지는 내일신문 그 자리가 편집실이었어요. 

 

박우정 2월까지?

 

이석원 그랬어요. 그리고 조금 있다가 바로 기상청으로 옮겼어요.

 

박우정 맞다, 옮겼다.

이석원 그건 <보도지침>하고 관계없이 그 때 우리가 편집진을 확대 개편했지 않습니까. 내일신문 건물 편집실은 정말 좁아서 <말>지를 확대하면서 박우정 선배님이 하던 편집장 자리는 홍 선배님 맡기로 했죠. 대신 박우정 선배님과 박성득 선배님 등은 편집위원으로 일하시기로 했죠.  

 

김언경 아 정말 정신이 없습니다. 하하, 도대체 누구 말이 정확한 것이라고 정리해야 하는지요. 그러니까 편집실이 두 개인 건 맞아요? 

 

이석원 봄에 기상청 앞인 ‘아래 다방’이라 이름 붙인 데로 옮겼어요. 거기서 9월 초 <보도지침> 말 특집호를 냈죠. 그러다가 이거 아무래도 위험하다 싶어서 김태홍 선배님이 무교동에 제2 비밀편집실을 하나 더 만든 겁니다. 

 

 

보도지침, 머리를 쭈뼛하게 만는 ‘물건’
 

홍수원 이석원 씨가 가져온 걸 보니까, 이게 보통 물건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부천서 성고문 이건 뭐 가장 추악하고. 또 기존 언론의 가장 치욕스러운 내용인데 이렇게 대조를 해보니까 100% 다 반영이 된 거죠. 개인적으로 욕심이 생겨서, ‘<말> 편집은 당신들이 계속하고 난 그거 붙들고 한 달 정도 내가 그걸 하겠다’고 했죠.

 

박우정 기억이 나네요. 원래 홍수원 선배님이 편집장을 하기로 했는데, <보도지침> 때문에 제가 조금 더 <말>지를 만들기로 했었네요.

 

홍수원 그렇게 서로 일을 분담했지만, 사실 당시에도 나는 이게 어디서 나왔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어. 그땐 될 수 있으면 묻지도 듣지도 않는 분위기였으니까. 그냥 ‘이석원 씨가 어디서 저걸 입수했나 보다’ 정도로만 알고 작업을 했죠.

 

이석원 사실 그건 김태홍 선배님께도 말 안 했어요. 그냥 “현역 기자인 친구한테 얻었는데 누군진 말 못한다” 그랬는데 김태홍 선배님이 대번에 “현역 기자 친구면 김주언 밖에 없잖아”라고 해서 으악 하고 말았죠(웃음).

 

박우정 매일 지침이 내려온 걸 받아 적은 종이의 분량이 어마어마했거든요. 가능한 전체를 내야 하지만, 또 모두 실을 수 없으니 선별해야 했어요. 그 작업을 총지휘하고 문건의 성격이나 의미를 드러내는 작업을 총지휘한 것인 홍수원 선배죠. 

 

박성득 자료 대조작업이 제일 복잡했죠. ‘보도지침’이 실제로 그 당시 신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실제 신문과 ‘보도지침’을 전부 대조해야 하니까요.

 

이석원 대조 작업을 했죠. 홍수원 선배님이 주로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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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원 ‘보도지침’이 실제 어떻게 반영이 됐는지를 전부 체크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단편적으로 한 것 같아서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가 참 부족했다는 그런 생각이 드네요. 아쉬워요. ‘보도지침’이 대단한 물건이구나 하는 걸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건이 크면 클수록 언론들이 모두 철저하게 ‘보도지침’을 그대로 지켰어요. 꼭 지침대로 따르지 않으면 치도곤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처럼 조직도, 박스기사, 해설기사까지 그대로. 여섯 개 신문이 그대로 똑같이 실었어요. 그 전에도 ‘제도 언론, 무슨 언론’ 이러면서 욕을 했지만, 아주 절망감을 느낄 정도였죠. 
 (「보도지침」 책 넘겨보며) 게다가 정부는 자신들의 발표 외에 독자적인 취재 보도 내용은 불가하다고 해놨어요. ‘너희들, 우리가 준 것만 보도하고 일체 따로 취재 보도할 생각 마라’ 이렇게 한 거죠. 
특히 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가이드라인은 정말 충격적이었죠. ‘검찰이 발표한 조사 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이런 굴욕적인 지침을 받아가지고 그대로 따른 거죠. 오죽하면 민언련이 ‘성고문 사건 관련 촌지 받은 제도 언론을 규탄한다’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어요. 언론에 대한 아주 통렬한 비판을 했더랬지. 그리고 김근태 씨가 자신이 당한 참담한 고문을 처절하게 증언했는데, 그게 ‘보도지침’으로 인해 일체 보도가 되지 않았어요. 
또 하나 기억나는 게 이들이 외신에 대해서도 엄청 신경을 쓰더란 것이죠. 필리핀에서 아키노 암살 이후 코라손 아키노 여사가 피플 파워 운동을 이끌었잖아요. 아키노 여사가 한껏 부각되고 마르코스는 흔들흔들하니까 그자들은 신경이 쓰여서 외신까지도 제대로 싣지 못하게 한거지. ‘이 친구들이 어지간히 급하긴 급하구나. 어떻게 외신까지도, 바깥소식까지 이렇게 억누르려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죠.  

 

김언경 비교 거리도 안 되지만, 저희도 작년에 MBN 불법 광고행위가 담긴 영업일지가 유출되었을 때, 그게 실제로 방송에 반영되었는지 찾느라 고생했어요. 그때 해보니 양이 너무 많아서 모두 확인하기 어렵더라고요. 만약 제가 그 당시 ‘보도지침’을 받았다면 주어진 시간에 전체를 다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홍 선생님은 당시 어떠셨어요? 주요한 사건 위주로 골라서 보셨어요?

 

홍수원 사실 나는 웬만하면 거의 다 해보려고 했어요. 다만 처음부터 신문 여섯 개를 다 놓고 하는 건 아니고, 신문 한두 개만 해보고 많이 반영된 사안이면 다른 신문도 확인하는 식으로 했죠.  

 

김언경 아, 그런 식으로 하셨군요.

 

이석원 하나하나 대조하는 게 얼마나 힘든 작업이었겠어요. 선배님이 얼마나 꼼꼼한지 거의 한 달, 밤을 새운 것 같아요. 마지막에 홍 선배가 “100%는 아니고, 95% 넘게 반영이 됐다”고 했던 기억이 나요. 

 

박우정 전두환 정권은 정권 자체가 정통성이 없었잖아요. 그러니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관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아까 홍수원 선배는 그 무렵 기자들은 어떻게 지침을 그대로 따랐을까 한탄했는데요. 사실 그 당시 상황에서는 기자들이 ‘보도지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면서 진실 보도하기는 대단히 어려웠을 거예요. 사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이른바 언론계 정화작업이라면서 반정부적이고 자기네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기자를 대거 정리해버렸잖아요. 

 

홍수원 물론 그렇지만 ‘보도지침’ 자체를 거부하진 못해도 젊은 기자들이 그걸 그대로 따르고 있는 편집 간부들에 저항하는 움직임 정도는 있어야 했는데 아쉽긴 하죠. 

 

이석원 아참, 그리고 우리가 <보도지침 특별판> 발표할 때 이건 정말 국가기밀일지도 모르겠다 싶은 위험한 내용, 우리가 정권으로부터 정말 꼼짝없이 책잡힐 수 있겠다 싶은 몇 가지는 뺐어요.

 

박우정 그래. 맞아요. 군사기밀 그런 건 뺐던 것 같아요. 걔네들도 국가기밀로 분류하고, 우리가 보기에도 ‘이거는 국가기밀이겠다’, 특히 군사 관련해서 무기 어쩌고저쩌고 하는 건, 이게 그대로 나가면 정말 안되겠다 싶어서 빼기로 했죠. 우리 나름대로의 ‘보도지침’이 있었던 거지(좌중 웃음). 
어떻게 찍어냈을까? 

 

김언경 자 그럼 <보도지침 특별판>의 콘텐츠는 그렇게 정리하셨고, 인쇄와 제작은 어떻게 했나요?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은데요.

 

박우정 그렇지. 이게 저놈들이 보기엔 불법 유인물 아니에요. 평소 <말>지도 인쇄하기 힘든데 <보도지침 특별판>은 폭발력이 엄청날 것임을 알기 때문에 인쇄하기 더 힘들었을텐데요. 사실 나도 궁금하네요.

 

박우정 그 인쇄소 사장 이름 지금 기억해요?

 

박성득 하하하. 그러니까 어떻게 된거냐면, 그 당시에는 인쇄소 돌아다닐 적에 꼭 김태홍 선배가 잡혀갔잖아요. 

 

홍수원 우리 그때 이거 제작하면서, 인쇄소에서 제발 좀 글자만 봐줬으면 했죠. 인쇄하는 사람들이 문맥을 보면 ‘이것 이상한거다’ 하는걸 알테니 ‘제발 글자만 읽어라’ 하고 바란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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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득 그래서 내가 쪼가리 쪼가리로 인쇄를 많이 줬어요. 한곳에서 다 찍지 않았어요. 그나마 본문은 괜찮아. 표지 인쇄가 제일 골치 아팠어요. 책을 어떻게 냈냐면, 충무로에 가면 맥주집들이 많아요. 거기 가서 맥주를 마시면서 보는거야. 그러다 누굴 하나 찍어서 술 몇 병 딱 보내. 주인이 갖다 주면서 “저 양반이 술을 보냈어요” 하죠. 그럼 술을 먹으며 “아이 뭐 고맙습니다” 그러거든. 
한두 잔 하다보면 “선생님, 이리 좀 오이소” 하지. 그렇게 좀 친해져서 한두 번 더 만나서 친해져둡니다. 그러다 사흘째 되면, 그 사람 인쇄소를 가 본다고. 왜냐면 기계가 없는 사람이 사기 칠 수도 있으니까. 가서 기계 다 보고 그런 다음 내가 “나랑 좋은거 하나 찍자”고 수작을 걸죠. “4도 칼란데, 현금으로 줄게”하면 업자가 이 사람이 뭔가 구린 거를 찍는가보다 딱 알아채요. “정말 그리 좋아요?” 그렇게 물으면 “죽이지” 그러죠. 하자고 결정되면 사이즈 미리 이야기하고 “필름을 언제 가져와라 몇 장, 몇 부 찍자” 정하면 대부분 주인이 한밤중에 나와서 혼자 찍어요. 하지만 이것도 꼬리가 길면 밟히게 되기 때문에 그때그때 계속 바꿔야했어요.  

 

홍수원 허허허 그랬구만. 

 

박성득 <보도지침> 표지 찍을 때는 내가 알게 된 인쇄소 주인 중에 한 사람이 자기 형님이 강동서 형사과장이라고 자랑을 하더라고. 이 양반이 좀 늙수그레했어요. 그 양반 찾아가서, “이번 거는 좀 양이 많아서 돈을 좀 많이 들어야 되는데”라고 했더니 반색을 하더라고. 그래서 표지는 그 양반한테 찍었는데, 그 양반도 이거는 참 겁난다 하더라고.

 

박우정 표지만?

 

박성득 그럼요. 표지하고 본문은 따로 찍어야지. 

 

박우정 야간작업하고 이러지 않았나?

 

박성득 항상 야간작업을 했어요. 본문은 쪼가리로 모두 찍어서 다른 데 갖다놓고, 표지는 표지대로 인쇄 끝나면 거기서 기다리다 얼른 딱 지게 실어서 옮기고. 제일 골치 아픈 게 제본이에요. 제본 제의도 마찬가지로 충무로에서 막 술 먹고 돌아다니다가 좀 ‘그런 놈’ 있으면 바로 현금을 주고, 선금도 없고 말도 없고 서로가 시간만 딱 정해서 했죠. 아무튼 <보도지침> 이건 정말 힘들게 조마조마하게 했어요.

 

박우정 그걸 몇 부 찍었지 첨에? 5천 부?

 

이석원 더 찍었어요. 8천 부인가 찍었던 것 같아. 재판도 찍었는데.

 

박성득 아무튼 그 때 홍선배가 나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우선 1천 부만 건지자”라고 했어요.

 

홍수원 그 당시에 그 <말>지 인쇄 제본을 끝냈는데 경찰이 나타나 압수한 적이 있었거든요. 경찰이 “너희는 다 찍어 주고 돈도 받아라. 그리고 떠날 때 연락하면 우리가 압수할 테니” 이렇게 업자를 회유한거죠. 

 

김언경 그렇게 해서 뺏긴 적이 있어요?

 

이석원 예. 그게 아마 봄에 한 건 그렇게 털렸죠, 아마? 물건 나가는데 거기서 딱 기다리고 있다가.

 

박성득 우리 <보도지침> 가지고 오는 날은 총동원이 돼서 골목마다 전부 지키고 있었어요. 국일관 근처에서 표지 따로, 본문도 다 따로 찍은 뒤, 마지막에 제본하는 날은 나 혼자 있었어요. 제본한 책을 가지고 나오는데 그날따라 유달리 많은 백차(경찰차)가 돌아다니더라고요. 홍 선배가 천 부만 먼저 건지자 그 말만 생각나서, 그걸 먼저 빼서 누구라고 말할 수 없는 선배 집을 한밤중에 찾아갔어요. 담을 넘어서 ‘좀 맡아주소’ 했더니 난색을 표하더라고. 그럴 때 서로 긴 말 하면 안돼요.

 

홍수원  아 그래서 그 집엔 못 맡겼어? 

 

박성득 그렇죠. 들고 나왔어요. 급하니 집 근처에 비닐하우스로 농사짓는 사람한테 맡기죠. 그 집에 일단 천 부 맡겨놓으니 그제야 맘이 좀 놓이며 배짱이 생기더라고. “일단 천 부 찍었으니 됐다 마. 에라 이놈들아. 잡아 갈라믄 잡아가라” 하고 말이에요. 다음 거는 편집실로 싣고 왔더니 좋아가지고 난리였죠(웃음). 

 

김언경 <보도지침>은 8천부 다 찾았어요?

 

박성득 그럼 다 찍었어요. 찍긴 다 찍었는데, 양이 많아서 제본에 고생했지. 처음에 천 부 숨겨놓고, 다음부터 2천 부씩인가 갖다 주니까 금덩어리 오는 것처럼 좋아서. 새벽 4시 반쯤인가 마지막 딱 싣고 오니 ‘아이고 만 부로 할걸’ 그런 생각이 들데.  

 

김언경 <보도지침 특별호>를 보면 삼원인쇄소인가 그렇게 써있어요. 그건 뭐죠?

 

박성득 몰라. 사실 실제 어디서 찍었는지는 지금도 일체 몰라요. 그냥 ‘랜덤’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이석원 나중에도 계속 몇 번 찍었으니까, 전부 아마 2만 부 찍었을 겁니다.

 

박성득 아, 그 뒤에 또 재탕 삼탕 했던 것 같아요.

 

 

‘물건’은 어떻게 배포했을까?

 

김언경 일단 책을 확보했어요. 그걸 어떻게 세상에 뿌렸을까요? 지금처럼 서점에 버젓이 내놓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박성득 그래 한 며칠 거기서 어슬렁어슬렁 했지. <보도지침> 내 놓고도 상당기간 거기서 그대로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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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원 <말>지 배포망이 두 가지였어요. 단체 배포가 있어요. 이를 테면, 전남민중민주협의회 뭐 이런 식의 단체들이 있어요. 그런 곳에 배포하고, 서울의 각종 단체를 통해서 배포하고. 그 다음에 대학가 사회과학서점 등에 배포했죠.

 

박성득 그 다음에 또 해직기자들에게 많이 떠맡겼죠. 거의 뭐 대리점 격이지. 한꺼번에 받아서 자기가 알아서 나눠주던지 팔던지 했죠.

 

이석원 사실 단체 배포해서 우리가 손해를 많이 봤죠. 가난한 지방 민주화운동 단체들은 책값 많이 떼먹었습니다.

 

김언경 책값을 제대로 준다기보다는 거의 뭐 받아주는 수준이었겠어요.  

 

박성득 하지만 나중에 <말>지가 제법 알려지고 난 다음에는 괜찮았어요. 우리끼리 그런 말도 했어. <말>지가 군소 운동단체들은 먹여 살린다고. 지방단체들에게 <말>지는 주된 수입원이기도 했어요. <말>지가 단체 후원금을 받는 데 상당히 좋은 역할을 했어요.

 

홍수원 이 <보도지침> 배포는 김태홍 씨가 굉장히 수고를 많이 했어요. 싸들고 다니면서 여기 저기.

 

박상득 거의 뭐 보부상이지 뭐. 보부상(웃음). 도망 다니며 파는 보부상이었지.

 

 

<보도지침>을 세상에 내놓은 후 어떻게 지냈나?

 

김언경 자 우여곡절 끝에 정말 <보도지침>이 나왔어요. 그 이후에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박성득 몇 달 후엔 거의 다 도망갔지?

 

이석원 다 튀었죠. 그래서 <말>지 8호는 제가 맡아야 했어요. 

 

홍수원 편집실이 어디로 갔었죠? 

 

이석원 <말> 지 8호는 무교동 그러니까 광교에 편집 사무실에서 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우리가 점심 먹으러 나가려는데 앞 사무실이 난리가 난 거야. 양쪽에 형사들 딱 있고, “꼼짝 마!” 그러고 앞에서 그냥 막 내부 수색을 하더라고요. 경찰에 들통이 난거죠. 다행히 우린 사진 식자판을 옷 속에 넣고 튀었어요. 그때 얼마나 오싹했는지. 

 

박성득 그 때 홍 선배는 어디로 도망갔어?

 

홍수원 아 난 서울에 있었어요. 서울에 내가 그 당시에 경찰들이 추정을 못하게 하려고 평소에 별 연락을 하지 않는 현직 기자의 집에 들어갔는데. 이게 가족이 있으면 곤란하니까 혼자 사는 현직 기자의 집으로 들어갔어요.

 

박성득 보기보다 용의주도하다니까.

 

홍수원 편했어요. 친구 출근하고 나면 그 반포아파트 24평짜리 혼자 다 쓰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또 벌이도 했잖아. 번역도 하고. 

 

박성득 음, 상당히. 이런 머리는 또 좋아. 

 

박우정 나도 그랬어. 자급자족했지. 

 

이석원 우리는 수배 생활을 정말 여유롭게 했어요. 친구들 만나면 “정말 정말 큰일 했다”며 자꾸 후원금을 주는 거에요. 덕분에 정말 수배생활 잘했어요. 

 

박우정 나는 전주의 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어. 날 숨겨준 양반은 교수니까 활동을 하면서 늦게 들어오는 거야, 술 잔뜩 취해가지고. 그럼 난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방 전체를 다 혼자 쓰는 거지. 거기서 번역거리 누가 보내줘서 그거 번역해서 보내고 막 이래가지고 현지 조달했지(웃음).

 

박성득 나는 그때 어디로 갔느냐면, 후배 아버지가 신촌 사거리 뒤에서 만화방을 했다고. 그래서 내가 만화방 점원이 돼가지고 떡 앉아있었지(웃음). 만화방에서 맨날 자고, 그 때 만화책을 수천 권을 봤고. 밤에는 영감님하고 또 한 잔 하고.

 

홍수원 그런데 난 수배 생활이 힘들더라고. 어때요? 수배가 힘들어요? 징역이 힘들어요? 난 아무리 편했다고 해도 수배생활이 더 좀 힘들던데. 

 

박우정 힘들지, 아유. 힘들어요.

 

홍수원 더 힘들어요?

 

박우정 네.

 

홍수원 어어.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박우정 난 아주 남의 집 살림을 살아줬으니까. 

 

홍수원 음.

 

박성득 아이, 그래도 징역보다는 낫지 않냐?

 

박우정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질 못하니까 내가.

 

홍수원 나는 어디 나갔다가 들어갈 때면, 꼭 5층 반포아파트 옥상으로 올라서 아래를 먼저 살펴봤어요. 혹시 차 안에 사람이 한두 명 있는 차가 머물고 있다 그러면 안 들어갔어요. 

 

박성득 굉장히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야. 생각해보니 예전 기상청에 있을 때 말이야. 같이 어디 가서 오는데 갑자기 내 팔을 탁 잡으면서 ‘저기 말이야, 저거 조금 이상하지 않아?’ 이러면서 겁을 탁 집어먹더라고. 그러더니 사무실에 안 들어가고 또 한참 뱅뱅이 돌고 그랬어요. 

 

홍수원 내가?

 

박성득 그래. 한 번은 갑자기 막 심각하게 ‘박성득, 이리 와 봐’ 하더니 그 두꺼비집을 보면서 지금 이집 주인이 수상하다는 거야. 우리가 모든 불을 껐을 때 두꺼비집이 막 돈다나. 이게 뭔가를 연결시켜 놓은 거 아니냐고(좌중 웃음). 며칠 막 그러시더라고. 굉장히 예민하고, 조심스럽고, 범죄형 기질이 좀 있어.

 

홍수원 하하하. 내가 그랬군. 수배 생활을 하면서 벌써 한 2~3년 수배 중이던 사람을 만났어요. 서로 얼굴은 아는 사이였지. 난 그 때 뭐 한 5~6개월밖에 안 됐는데. 내가 그 친구한테 위안을 받은 게, 벌써 나보다 훨씬 수배 강도도 높고, 오랫동안 시달려온 사람의 태도가 참 다르다 싶더라고요(웃음). 나만 고통 받으면 다행인데, 집으로 남영동에서 찾아와서 식구들에게 막 험한 소리하고. 그걸 동네 사람이 보고, ‘야 저거 진짜 간첩, 간첩인가보다’ 오해하고. 그리고 통반장들을 움직인대요. 파출소 사람들이 통반장을 움직이는지 몰라도, 이런 사람들을 막 움직여서 신경 쓰이게 만들고. 참 가족들에게도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죠.

 

김언경 박우정 이사장님은 연행되셨잖아요. 

 

박우정 장인이 그 때 굉장히 편찮으셔서 오늘내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갔지.

 

홍수원 선고도 그 때 끝났어요? 1심 선고 끝났고?

 

박우정 끝났고 재판 중이었던가 하여튼 그래요. 수배도 풀렸으니 하고 자수하는 형식으로 경찰서에 갔는데 이 자식들이 남영동으로 끌고 가는 거예요. 그나마 재판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불기소 처분인가 받아가지고 나왔지.

 

 

마음이 여렸지만, 누구보다 용감했던 김태홍 선배에 대한 추억

 

박성득 참 돌아가셨지만, 김태홍 선배 하면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어요. 그 양반이 개인적으로는 참 연약한 사람이야. 다정다감하고, 좀 싱거울 정도로 연약한 양반이었어요. 그때가 보도지침 할 땐지, 찍고 난 다음인지 아무튼 둘이서 여관에서 잠을 자게 됐어요. 그 양반이 평소에는 뭐 용감한 척하잖아. 그런데 양말을 벗으면서 ‘성득아, 이 양말 사흘째 신는데 이 짓도 못하겠다’ 그러면서 ‘야, 집안도 개판이고 우리가 언제까지 도망 다녀야 되는지’ 푸념을 하는데 눈물을 글썽글썽 하더라고. 그 모습을 보니까 참 안됐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침에 시장에 나가서 양말을 두 켤레 사다 줬어요(웃음).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 생각이 이상하게 더 많이 나. 그 양반이 여관방에서 얼마나 많이 잤겠어. 

 

홍수원 김태홍 선배가 여린 면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좋아한 거지. 강하게만 보인다고 사람들이 좋아하진 않지. 

 

이석원 아이 우리 선배님들 사실은 다 그래요. 가만히 보면 좀 내향적이고 내성적인 분들이 더 많았죠.

 

박성득 게다가 김태홍 선배는 사람이 용의주도한 데도 없어서 더 고생을 많이 했어요(웃음). 

 

홍수원 김태홍 씨는 일을 벌리는 타입이고, 뒷수습은 누가 따라다니면서 했지. 

 

이석원 그 양반 지나가시면 누가 빗자루 들고 다녀야 돼요(웃음).

 

박우정 하지만 말이야. 난 생각해요. 김태홍 선배가 10·26 직후 기자협회를 정상화시킨다며 기자협회장이 되었고, 80년 5월 총회에서 검열거부와 제작거부 결정을 했죠. 만약 김태홍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기협 회장이었다면, 그게 가능했을까요? 그 일을 과연 누가 할 수 있었겠어요. 나는 김태홍 선배가 아니었으면 아무도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 분의 친화력과 노력이 그 일을 해 낸거죠. 

 

이석원 내가 볼 때는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선배님 중에 싸움꾼 기질을 타고났다 하는 사람은 이부영 선배님 정도가 아닐까요? 다 여린 분들. 직장에서 쫓겨날까봐 달달달달 하시던 분들인데, 속으로 달달달 떨면서도 ‘그래도 해야지…’ 했던 분들 같아요.
생각해보면 송건호 선생님도 여리셨어요. 한번은 송건호 선생님께 ‘시국선언 하는데 선생님 나가셔야겠습니다’ 하니까 그냥 조용히 ‘알았어요’ 하고 다녀오셨거든요. 마침 그날 저녁 회원의 날 행사가 있었는데 송건호 선생님이 ‘내 잡혀갈까봐 오늘 무서워서 혼났어요. 그래도 칫솔은 내가 쓰던 걸 써야 되겠기에 아침에 이렇게 칫솔은 가지고 나왔어요’ 그러시더라구요. 송건호 선생님은 단상에 앉으실 일이 많으셨는데, 또 나가라 말씀드리면 그렇게 나가서 앉아있고 그러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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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지침 폭로’의 의미
 

박우정 ‘보도지침 폭로’의 역사적 의미는 다 짚었겠지만. <보도지침> 나온 게 86년 9월이고, 그 다음에 87년 6월 항쟁이 있었죠. 아까 보도지침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6·10의 전사(前史)라는 얘기가 나왔는데, 실제 ‘보도지침’은 6·10의 분명한 도화선이 되었어요. 전두환 정권의 폭압성과 포악성을 여실하게 드러낸 것이 보도지침이었거든. 아무리 독재정권이라고 해도 언론과 권력이 야합을 해서 이렇게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특히 ‘부천서 성고문 사건’. 정권은 이 사건을 ‘성을 혁명 도구화 한다’는 식으로 왜곡했어요. 그런데 실상은 정권을 유지하려고 그렇게 참혹하게 학생을 고문한 것이었고, 그래놓고 그게 드러날까봐서 막 기를 쓰고 언론을 통제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국민들의 분노에 불을 붙인거죠. 박종철 사건이 직접적인 도화선이긴 했지만, 보도지침 폭로도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요. 
6월 항쟁 이후 군사 정권이 항복을 했어요. 정권 교체까지는 못했지만 그 여파로 해직기자들이 언론자유를 외치며 복직투쟁도 하고, 제도언론에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으니까 새 언론을 만들어야겠다는 논의가 힘을 받은 거죠. 결과적으로 한겨레신문 창간에도 결정적인 보탬이 된 게 ‘보도지침 폭로’에요. ‘보도지침 폭로’를 통해 국민들이 기존 제도언론에 불신을 품게 되었고, 보도지침을 폭로한 해직 기자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언론에 국민들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수 있었죠.

 

홍수원 <보도지침>이 폭로되기 이전까지 사람들은 정권의 언론통제가 좀 있으리라 생각하는 정도였을 거예요. <보도지침>처럼 이렇게까지 시시콜콜하게 가이드라인을 설정하고, 유도하고, 꼼짝 못하게 묶어 놓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을 겁니다. 실제 <보도지침>을 보고난 후 너무 충격적이라는 표현이 많았고요. 언론이 전두환 정권의 가장 중요한 통치 수단이었구나 그렇게 느꼈을 거예요. 저는 그런 면에서 <보도지침>이 상당히 여러 가지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성득 말해 뭐해. 화끈하게 보여준 거지. 완전히 ‘똘마니들이구나’ 싶은. 언론이라는 놈들이 모조리 똘마니. 시키면 시키는 대로 ‘옳다’ 하는 것 보니까 이게 똘마니가 아니면 뭐가 똘마니야.

 

박우정 역대 독재 정권이 정권을 유지하는 두 가지 중요한 수단 중 하나가 소위 공권력이라는 검찰과 경찰 권력. 그리고 그 다음이 언론이에요. 경찰은 진짜 인신을 구속하는 것이고 언론은 정신을 지배하는 것 아니에요? 정신을 ‘보도지침’을 통해서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 이게 상당히 중요하죠. 권력이 언론을 그런 식으로 통제했고, 통제하는 방식이 그 후로 굉장히 진화한다는 것. 그런데 당시 ‘보도지침’처럼 요즘은 일일이 그러지 않는단 말야. 대신 공영방송 같은 곳에는 정권이 사장을 직접 내려 보내 총통정치를 펼친단 말이에요. 사장 인사권을 쥐고서요. 말하자면 주요한 구성은 다 장악한단 말이야. 그런 식으로 진화를 했죠. 아무리 기자들이 파업을 하고 농성하고 이래도 사장과 경영진, 지도부가 물러나지 않으면, 시청률이 떨어지든 말든 그대로 그냥 계속 굴러가고 있잖아요.

 

 

나에게 <보도지침>이란? 후배들에게 한마디
 

김언경 마지막으로 예전에 했던 활동을 회고하시면서 <보도지침>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한 번 정리해주세요. 또는 지금 언론을 보며 드는 생각, 언론인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씀. 언협과 민언련 활동가들한테 해주시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해 주시면 좋고요. 

 

박우정 나는 해직된 후에 ‘보도지침 폭로’나 <말>지 발행과 같은 언협 활동 없이 그냥 허송세월했다면 인생이 좀 비참했을 것 같아요. 근데 아까도 말했지만 해직기자들이 이렇게 노력을 해서 언협을 만들고 <보도지침>을 내고,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면서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고 또 그것이 한겨레신문으로 이어지면서 기자로 제대로 살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런 것이 없었다면 참. 내 인생이 가난했을 거다. 그런 점에서 보면 언협이 참 고마운 존재지. <보도지침>은 각자에게 다 그렇겠지만 굉장히 획기적인 사건. 어떤 분수령적인 사건이에요.
그리고 김 처장이 기자들한테 한마디 하라고 했으니 말해본다면요. 사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너무나 태평세월이야. 아니 요즘 정권 비판한다고 해서 잡혀가서 치도곤 맞고 그러나? 현재 언론의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지만, 기자들한테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봐요. 옛날 우리 그 당시 엄혹한 시절에 <보도지침>을 내놓기도 했는데 요즘 같은 상황에서 제 역할을 못한다는 것은 기자들 자신한테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박성득 나는 <보도지침>이 교과서에 들어가야 한다고 봐요. 왜 그런가 하면, 제가 서울 생활을 끝내고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느끼는 점은 지역과 지역 언론의 부조리는 또 만만치 않더란거죠.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승진하려면 돈을 얼마를 바쳐야 한다 같은 매관매직이 실제로 이뤄집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제대로 된 언론이 하나라도 살아있으면 지역이 확 바뀝니다. 

 

홍수원 그저 보탤 게 없는데. 아까 와 가지고 사무실도 못 찾고 왔다갔다 했는데. 얼마나 그 동안 무심했으면 이럴까 싶어 미안하더라고(웃음). 옛날 처음 언협이 생겼을 때 사무실이 이 근처였잖아요. 이 근처란 건 알고 있지만 오늘 처음 이제 와서 보니까 사무실도 크고, 상근자들도 많아서 든든한 느낌도 들고. 또 최근에 갑자기 회원 수가 늘었다 하니, 그게 나한테 제일 큰 뉴스였어요. 그래도 옛날에 뭐 한 축에서 조금 일을 거든 사람으로서 사무실 와서 보니까 뿌듯한 느낌이 들어서 다행이다 싶어요.
 
이석원 저는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일을 같이 했었구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가 참 행복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후에 저도 이런 단체도 했다가 저런 단체도 했다가 그랬습니다만, 언협 시절이 참 행복했다고 생각합니다.

 

정리 김언경 사무처장 사진 박제선 홍보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