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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로버트 할리의 성적 지향이 궁금하지 않다마약 투약 혐의로 체포됐던 방송인 하일(미국명 로버트 할리)씨가 10일, 경찰의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석방됐습니다. 수원지법은 “피의 사실에 대한 증거 자료가 대부분 수집됐고,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영장에 기재된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있어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영장을 기각했고 하일 씨는 불구속 수사를 받게 됐습니다. 체포 후 소변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고 하일 씨도 자신의 혐의를 인정했습니다.
대중에게 친근했던 하 씨의 마약 투약 소식에 많은 시민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일 씨가 체포된 8일부터 관련 보도도 쏟아졌는데요. 9일자 뉴시스 보도를 시작으로 느닷없이 하일 씨가 성소수자라며 동성애를 ‘부끄러운 일’로 모욕하는 기사가 확산됐습니다.
민언련은 이 문제적 기사들을 전하는 것이 또 한번 성적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언론이 터뜨려버린 내용들을 되돌리기는 어렵기 때문에 보도들의 심각성을 전하기 위해 문제 기사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기자들이 어떤 표현이 인권침해인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도 기사의 표현을 그대로 전달하는 배경입니다.
유명 연예인 사건마다 반복되는 ‘인권침해 보도’
범죄보도, 약물 및 마약 보도 등 모든 부정적인 사안에 그와 상관없는 소수자성을 부각하는 것 자체가 모두 해당 소수자에 대한 인권침해입니다. 다시 말해서 특정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여성이거나, 중국동포이거나, 장애인이거나, 이주아동이거나, 성적소수자이거나, 탈북민이거나 그것은 그저 범죄일 뿐입니다. 언론이 범죄 용의자가 장애인이었거나, 성적소수자였다거나 이런 식으로 연관시켜 보도하는 것 자체가 해당 소수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편견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한국기자협회가 만든 <인권보도준칙>에는 민주주의와 인권, 성평등, 장애인 인권, 아동, 청소년, 노인, 성적소수자, 이주민, 탈북민을 보도하면서 언론보도가 무엇을 유의해야 하는지 적시하고 있는데요. 그 모든 것의 기본이 바로 범죄 및 부정적인 사안과 해당 소수자를 일방적으로 연결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8장 성적 소수자 인권
언론은 성적 소수자에 대해 호기심이나 배척의 시선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가. 성적 소수자를 비하하는 표현이나 진실을 왜곡하는 내용, ‘성적 취향’ 등 잘못된 개념의 용어 사용에 주의한다.
나. 성적 소수자가 잘못되고 타락한 것이라는 뉘앙스를 담지 않는다.
다.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 경우 성적 지향이나 성 정체성을 밝히지 않는다.
라. 성적 소수자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2. 언론은 성적 소수자를 특정 질환이나 사회병리 현상과 연결 짓지 않는다.
가. 성적 소수자의 성 정체성을 정신 질환이나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묘사하는 표현에 주의한다.
나. 에이즈 등 특정 질환이나 성매매, 마약 등 사회병리 현상과 연결 짓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하일 씨 관련 보도는 한마디로 몰상식한 보도입니다. 마약은 우리 사회에서 아주 많이 비판받는 범죄행위입니다. 그런 마약범죄 관련자를 언급하면서, 그가 성소수자였음을 보도하는 것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큰 잘못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일 씨 본인에게도 부당한 일이며, 성소수자 모두의 인권을 침해하고 성소수자 혐오를 부추기는 행태입니다.
더욱이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성소수자 정체성을 제3자에게 알리는 아웃팅(outing)은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범죄입니다. 편견과 혐오가 여전한 한국사회에서 아웃팅은 성소수자에게 매우 큰 고통을 줍니다.
느닷없이 등장한 ‘동성애’, 인권 짓밟은 뉴시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보도가 문제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성소수자 혐오를 부추긴 보도는 뉴시스 <몰몬교 신자가 마약까지, 로버트 할리 부끄러운 민낯>(4/9 조성필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기사 첫 머리부터 하일 씨의 성적 지향을 겨냥했습니다.
몰몬교 신자로 알려진 방송인 하일(60·미국명 로버트 하일)씨가 과거 마약 투약이 의심되는 당시 동성행각까지 벌인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몰몬교는 동성애를 부정하는 보수 성향의 종교로 불리운다. 하씨의 경우 몰몬교 신자로 해당 종교에서 금기시하는 마약과 동성애를 동시에 하는 등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뉴시스가 오로지 하일 씨의 ‘동성 행각’을 유포하기 위해 이번 사건이 아닌 과거 사건을 동원했다는 점입니다. 지난해 3월 한 남성 마약사범이 “하 씨와 연인관계로 함께 마약했다”고 주장했고 이에 따라 하일 씨도 수사를 받았으나 마약 음성 결과가 나와 무혐의 처분됐다는 것이죠.
하일 씨가 실제로 그 마약사범과 연인관계인지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사실이라 하더라도 마약 투약과 “동성행각까지 벌였다”, “마약과 동성애를 동시에 하는 등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라는 표현에서는 동성애를 마약과 다름없는 범죄 행위처럼 이해하고 있는 기자의 시각이 드러납니다. 이는 소수자에 대한 인권의식이 현저히 낮은 우리 언론의 현주소를 그대로 방증한 것입니다.
보도 뒤덮은 ‘성소수자 혐오’…그 참담한 현실
뉴시스는 보도 직후 여론의 비판이 일자 포털과 자사 사이트에서 해당 보도를 전부 삭제했으나 이미 중앙일보·세계일보·한국경제신문을 비롯한 많은 언론에서 비슷한 제목과 내용의 보도를 쏟아낸 후였습니다.
△ 동성 연인에 초점 맞춰 전한 인터넷 보도들(네이버 검색화면)(4/10)
세계일보가 뉴시스의 해당 보도를 그대로 전제한 <동성애·마약…'몰몬교' 로버트 할리 부끄러운 민낯>(4/10)은 여전히 게재되어 있습니다. 세계일보는 아예 제목에 ‘동성애’를 명시해 더 명확하게 인권을 침해했습니다. 비슷한 성격의 보도, ‘마약’보다 ‘동성 연인’에 초점을 맞춰 기사 제목을 뽑은 사례가 상당히 많습니다.
수많은 타 매체 보도에서도 동성애 혐오가 그대로 반복됐습니다. 제목만 훑어봐도 심각한 사례가 속출합니다. 한국일보 계열의 스포츠·경제신문인 한국스포츠경제는 <‘마약에 동성 불륜 의혹까지’ 몰몬교 신자 로버트 할리의 추악한 민낯>(4/10 박창욱 기자)라는 제목의 보도를 냈습니다. 문제를 인식했는지 현재는 제목에 ‘추악한’을 삭제한 상황입니다. 매일경제 산하의 연예전문지 스타투데이는 <로버트 할리 공범, 연인 관계?... 마약 이어 동성애 논란까지 ‘충격의 연속’>(4/10 유림 인턴기자)라는 기사를 냈습니다. 동성애가 어떤 논란적인 사안이라도 되는 양 묘사했습니다. ‘이성애 논란’이라는 말이 성립하는지 생각해본다면 상당히 부끄러운 보도들입니다. 기자들의 인권의식도 문제이지만 이런 보도를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내보내는 데스크의 책임도 큽니다.
‘감추고 싶은 부분’임을 알면서도 공개…잔인한 TV조선
방송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4월 10일자 TV조선 <보도본부핫라인>은 하일 씨 사건을 다룬 코너의 제목을 아예 <공범의 정체>라고 뽑았습니다. 문승진 기자는 “할리 씨가 경찰에게 끝까지 감추고 싶었던 부분이 한 가지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면서 운을 띄웠습니다.
이는 성소수자에게 성정체성 노출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TV조선도 아주 잘 알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일 씨가 감추고 싶어 한다는 걸 알면서도 TV조선은 관음정적 제목과 함께 그 감추고 싶은 사실을 여과 없이 보도했습니다. 그야말로 잔인한 보도 행태입니다.
△마약보다 동성연인에 초점 맞춰 보도한 TV조선 <보도본부핫라인>(4/10)
△마약보다 동성연인에 초점 맞춰 보도한 TV조선 <보도본부핫라인>(4/10)
윤우리 기자는 “당시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남성 A씨와 로버트 할리가 할리의 자택을 자주 드나드는 CCTV 영상을 확보했다고 하고요. 또 조사 과정에서는 이 두 사람이 마약을 투약할 때 동성 행각을 짐작하게 할 만한 진술도 일부 받아냈다고 합니다”라고 전했습니다. 이는 모두 이번 마약 투약 혐의가 아닌 지난해 3월 조사 당시의 상황들입니다. 오로지 하일 씨의 성적 지향을 부각하기 위해 과거 사건까지 끌어온 뉴시스와 판박이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와 사귀는지’는 시민의 알 권리가 아니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하 씨의 마약 투약 여부입니다. ‘동성연인’, ‘몰몬교 신자’는 하일 씨의 혐의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언론이 ‘몰몬교 신자인 하일 씨가 동성애를 했다’며 이를 ‘마약 혐의’와 동일시한 겁니다. 이런 보도는 당사자와 그 가족의 인격을 모독함은 물론, 본래 사건의 본질인 ‘마약 범죄’마저 흐리게 합니다. 이러한 인권침해를 저지르지 않고는 주목도 높은 기사를 쓸 수 없는 것인지, 언론인들은 성찰해봐야 합니다.
언론은 시민의 알 권리를 위해 가끔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제가 붙습니다. 해당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얻을 수 있는 공익적 목적이 침해당하는 사적 이익보다 현저히 클 때만입니다. 하 씨에게 동성 연인이 있었는지 아닌지를 알아봐야 우리 사회와 시민들의 이익에 도움 될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저널리스트를 참칭하고 알 권리를 핑계로 인격살인을 저지른 기자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사건과 관련 없는 요소를 끌어와 개인의 인격을 짓밟아서는 안 된다는 상식이 기자들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원칙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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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이봉우 활동가(02-392-0181) 정리 박철헌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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