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신문_
경제지 대선 보도 바로 보려면 ‘프레임’을 알아야 한다1. 경제지의 대선 보도 모니터링 필요성
지금까지 경제지에 대한 모니터링은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이는 인력이나 시간 등의 여건에서 열악한 언론감시 주체들이 종합지에 대한 모니터링이 긴급히 요구되는 사정에 우선적으로 대응해야 했던 것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며 경제라는 ‘전문’적인 매체에 대한 모니터링을 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적잖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제지의 위상과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이에 감시가 필요하다는 내외부의 요구가 커졌다. 대선미디어감시연대는 이런 필요성을 절감하고 감시 대상에 경제지를 포함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사회에서 경제지의 영향력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경제지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기존의 매일경제, 한국경제, 서울경제 등 30~4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매체들 외에 신생 매체들이 꾸준히 생겨났다. 이는 독자들의 경제에 대한 관심과 함께 날로 어려워져 가는 언론 경영 환경에서 경제지가 종합지들에 비해 수익을 내기에 용이하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는 점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지들은 경제와 관련된 정보, 경제 주체들의 동향을 제공하며 세계경제의 흐름을 분석해주고, 경제운용과 관련된 정부의 정책과 기업의 과제에 대해 유용한 기사와 논설들을 싣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 폐해와 부작용도 매우 크다. 경제지는 ‘경제’에 대한 인식과 경제 관련 의제 설정, 경제 관련 용어 사용 등에서 여론을 왜곡시키고 독자들을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다. 경제지에 넘쳐나는, 마치 공식과도 같은 현실 인식과 표현들은 경제의 도우미가 아니라 오히려 경제의 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대거 늘어난 경제지들이 유포하는 정보와 지식들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 그것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언가의 존재가 오히려 그것의 부재를 보여주며, 무언가를 얘기하는 것이 아닌 얘기하지 않는 무언가가 오히려 그것을 말해주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사례가 경제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같은 왜곡과 호도는 경제지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 즉 ‘경제 전문’ 매체에서 ‘경제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기사들에 씌워지는 ‘후광 효과’와 겹쳐 더욱 그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어렵게 한다.
2. ‘경제’에 대한 협소한 인식
무엇보다 경제에 대한 협소한 인식을 지적하고자 한다. 의도적인 것이든 무지에 의한 것이든 경제에 대한 협소한 인식이 협소한 보도를 낳고 협소한 보도가 다시 협소한 인식을 부른다.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다시 원인을 부르는 인과 사슬의 악순환이다. 이는 기업(압도적으로 대기업)과 언론 사이의 관계에서, 언론이 대기업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 중계하고 유포하며 대기업은 다시 언론의 그 같은 논리와 지원을 토대로 더욱 ‘친(대)기업적인’ 논리를 펼치는 식으로도 나타난다. 이중의 인과-악순환 관계가 작동하는 것이다.
정치에 부정적 낙인찍기
대표적인 것이 ‘정치’에 부정적 낙인을 찍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경제지에서 경제는 선이며 정치는 악으로 묘사된다. 정치(정치의 혼탁한 면이 아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정치)는 절대로 경제에 개입해선 안 되는 것으로, 그래서 정치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은 정치에 의한 경제의 오염으로 규정된다. 특히 선거 때에는 이 같은 경제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정치, 정치의 포퓰리즘에 의한 경제의 훼손에 대한 우려가 특히 경제지를 통해 대대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쏟아진다. 이번 대선에서도 벌써부터 그런 기류를 감지할 수 있다.
‘경제 주체’를 대기업 편향적으로 보는 태도
경제지의 이 같은 논지 경향과 그 논지를 펴는 데 있어서의 일방성은 경제지가 우리 ‘경제’의 주체를 매우 일부분의 집단으로 한정하고 있는 데서 크게 비롯된다. 우리 경제를 구성하며 거기에 참여하는 주체들은 매우 다양하다. 기업과 정부, 노동자, 자영업자, 농민, 실업자, 주부, 심지어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어린이들도 경제 주체이다. 모든 국민들이 차지하는 그 몫에서 크고 작은 것은 있지만 모두 경제활동의 주체들인 것이다. 그러나 경제지에서 설정한 ‘경제’의 주체는 대체로 대기업. 반면 노동계는 경제의 주체가 아닌 ‘문제’의 대상이다. 또한 구조적으로 기울어진 노사 운동장의 균형을 맞추도록 하려는 움직임이 표출되는 것이 당연하며, 특히 이는 선거 국면에서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데, 이 기사는 이를 균형추의 붕괴로 우려하고 있다.
전경련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꾸짖을 자격 있을까. 매일경제는 <사설/전경련 이름만 바꾼다고 될게 아니다 새롭게 태어나라>(3/25)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이 1968년 이후 50년 가까이 유지돼 온 명칭을 '한국기업연합회'(한기련)로 바꾸기로 한 것에 대해 새롭게 태어나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정작 경제지들 역시 사설의 결론처럼 ‘새롭게 태어나야’ 할 듯하다.
3. ‘포퓰리즘 낙인’ 씌우기
기업 입장은 ‘절박한 호소’로 포장하면서 재벌개혁 등의 대선 공약은 무조건 ‘포퓰리즘’
포퓰리즘 낙인은 거의 모든 경제지들에서 마치 하나의 편집방침처럼 확고하게 뿌리 내려 있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포퓰리즘’이란 낙인이 씌워지면 합리적 숙의 불가하다.
예를 들면 매일경제 <대선주자, 대기업 손보기 최우선…노동개혁은 ‘뒷전’>에서는 대선주자들이 “최우선 개혁 분야로 대기업 집단을 꼽았다”면서 “대기업의 특권과 반칙을 줄여 공정한 경제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주장이지만, 자칫 기업 경영과 투자활동을 위축시켜 ‘교각살우(矯角殺牛)’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면서 이를 ‘대기업 때리기’, ‘포퓰리즘’으로 규정하고 있다.
‘진보’라고 분류하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후보 외에도 ‘보수’이며 친 기업적으로 분류될 수 있는 자유한국당의 김관용 경북도지사와 이인제 전 의원,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 등 범보수 후보들까지 앞 다퉈 대기업 개혁을 얘기하고 있는 이유와 배경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것이다.
‘정부=가해자 vs 대기업=피해자’ 이분법
한국경제 <박재완 칼럼/‘대통령 탄핵이 남긴 숙제’>(3/27) “기업의 문화·스포츠재단 출연이 뇌물인지 준조세인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행인지 경계가 모호하지만 그 배경은 정부의 영향력에 있다. 정부에 불투명한 재량이 없다면 출연의 반대급부든, 불응에 따른 불이익이든 파생될 여지가 없다. ... 정부 입김의 축소보다 최순실 사태의 재발을 막는 더 나은 대안은 없다”, “기업인들에 대한 출국 금지와 구속수사에 대해 수사권이 남용된 것은 아닌지 자성하기 바란다”,
4. 경제지들이 얘기하지 않는 것
어떤 사안에 주목하고 어떤 사안을 소홀히 하는지 살펴보면 그들이 주로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으며, 그들이 기피하는 논의는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태도는 경제지가 대선을 바라보는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기업을 위해서는 열성적으로 대변하고 염려하는 경제지들이지만 잘 얘기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대한 보도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사회책임 관련 제도와 법규를 강화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고 있고, 어느 때보다 그에 대한 기대가 높지만 우리의 경제지에서는 그에 대한 보도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가령 CSR의 한 부분인 사회책임투자(SRI·Social Responsibility Investment), 즉 기업의 재무적 성과뿐 아니라 환경과 사회, 지배구조 등 비재무적 성과를 반영해 투자하는 것이 세계적으로 큰 흐름이 된 지 오래지만 우리 경제지는 이에 대한 소개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사회책임투자포럼에 따르면 우리나라 공적 연기금의 사회책임투자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2015년 말 기준으로 세계 사회책임투자 시장 규모는 22조 달러에 달하는데 한국은 0.1%도 안 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SRI 시장 규모는 72억 달러 수준에 그친다. 국민연금만 봐도 올해 1월 적립금이 561조원인데 이중 사회책임투자는 6조 원 가량에 불과하다. “사회책임투자는 결국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촉구하는 기능을 하고 있고 기업이 사회적책임을 다하면 그 자체로 경제민주화 많은 부분을 실현할 수 있다”는 양춘승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의 말처럼 사회책임투자는 경제 민주화의 한 방도다. 우리 경제의 앞날에 매우 중요한 논의이지만 한국의 경제지에서는 이에 대한 소개를 극히 꺼린다.
5. 경제지들의 선거프레임 바로보기
선거 프레임 대결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기득권 보수 언론은 적폐청산이냐 국민통합이냐, 분열이나 화합이냐는 구도로 설정하고 있다. 경제지들은 ‘시장주의 대 반(反) 시장주의’, ‘자유경제 대 반(反) 자유경제’의 프레임 내세운다. 평상시의 보도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선거 국면에서 경제지들은 이 프레임으로 후보 선택의 기준을 제시하고 후보들을 견인하려 한다. 이들에게 시장주의는 경제학이 아니라 ‘종교적 교의’에 가깝다. 그 교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시장주의와 자유경제가 위협받고 있다고 현실을 진단한다. 그 같은 진단으로부터 후보들의 정책과 공약에 대한 당부(當否)의 판정을 내린다. 자신들의 기준에 어긋나면 ‘이단’으로 규정한다. 이렇게 해서 자유시장주의 전파의 목적과 인식과 수단의 ‘3위일체’가 완성된다.
‘친 시장주의’ 기준으로 호감-거부감 나눠
이들에게는 정부와 시장이 상호보완적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다. 정부로 대표되는 공공의 적정한 기능과 역할이 작동해야 공정한 ‘시장’이 형성된다는 것에 대한 이해-혹은 이해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다. 그런 태도가 대기업개혁 등 경제정책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특정 후보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난다.
문재인의 ‘큰 정부’에 시비 삼고 싶은 경제지들
보육 교육 의료 요양 등 복지 분야에 재정 지출을 과감하게 확대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라면서 정부 역할을 강조한 ‘큰 정부’를 내세웠다고 평가. ‘큰 정부’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시비를 삼을 일이 아니나 공공부문의 방만한 경영 등 우리 사회에서 공공과 정부의 확장에 대해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거부감-이에는 타당한 측면도 있지만 왜곡된 정보 제공 등에 의한 과도한 비판도 있다-을 생각하면 부정적인 낙인. 문재인에 대해 ‘민간의 자율을 해치는 비대정부를 만들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할 수 있는 평가이며 편집했다. 반면 안 후보는 ‘규제 간소화’ ‘반기업 정서의 문제점 지적’ 등 시장중심의 정책 기조를 내세우는 후보로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