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_
MBC <제5공화국> '5·18' 관련 방송에 대한 민언련 방송모니터위원회 논평(2005.7.6)
등록 2013.08.1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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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노력 돋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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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정치드라마 <제5공화국>이 지난 6월 11일부터 5회에 걸쳐 5·18 광주항쟁을 다뤘다. 그동안 SBS 드라마 <모래시계>나 몇몇 특집극 등에서 '광주항쟁'을 다룬 적은 있었지만, 항쟁의 시작과 끝에 이르는 전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낸 TV 드라마는 <제5공화국>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제5공화국>은 철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광주항쟁의 역사적 실체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특히 '학살책임자', '미국의 묵인 또는 지지', '언론의 왜곡보도' 등 그 동안의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민감한 부분까지 과감하게 다루면서 시청자에게 진실을 전하고자 노력했다.


<제5공화국>은 광주학살의 책임이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6월 18일 방송분(17회)에서 전두환은 계엄군이 장악했던 광주신역을 광주시민들이 되찾으려 하자, "광주신역을 빼앗기면 보급품과 병력 수송에 차질이 생겨.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광주신역을 지켜내라고 해"라며 허화평에게 지시한다. 이어 광주항쟁 당시 첫 발포가 5월 21일 새벽 광주신역에서 실제로 이뤄졌고, 전두환은 발포 여부에 연연하기 보다 "역은, 신역은 어떻게 됐어?"라며 계엄군의 상황을 걱정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또 80년 5월 21일 낮 도청 앞에서 이뤄진 계엄군의 대규모 발포에 대해서도 전두환을 발포명령자로 단정하지는 않았으나, 그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음을 상세히 보여주었다. 계엄군과 광주시민이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은 계엄군 철수를 결정하고, 이를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건의해 다시 한번 철수를 결정한다. 하지만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만이 철수를 반대했고, 결국 실권을 가지고 있던 전두환측의 입김에 의해 도청에 있던 계엄군에게까지 철수명령이 하달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리고 곧 이어 '어딘가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은 계엄군이 발포를 시작하는 것으로 그렸다.


<제5공화국>은 6월 19일 방송(18회)에서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과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의 대화를 통해 미국의 책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브루스터는 "전두환 장군측은 23일 광주에 재진입하려는 것 같다"며 "어차피 워싱턴에서는 전두환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광주의 미국인을 서울로 피신시키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며 미국인들의 피신을 논의했다. 결국 한국군의 동태 파악을 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 작전지휘권까지 가지고 있던 미국이 전두환을 저지하기는커녕 묵인 내지는 지지했던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이밖에도 미항공모함 코럴시호가 부산항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군들이 '미국이 우리를 구해주러 왔다'며 환호했지만 사실은 미국이 신군부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줬다.


6월 25일 방송분(19회)에서는 언론을 길들이려던 신군부와 이에 순응한 우리 언론의 부끄러운 과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이날 전두환이 "언론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으면 광주사건을 해결할 수 없어. 언론에서는 광주사건을 계속 폭동으로 밀어붙여야 돼"라고 말하자 허화평이 "언론사 사장들을 만나서 압력을 넣는 게 어떻겠습니까?"라며 조언했다. 이어 곧바로 전두환이 언론사 사장단과 사회부 데스크들을 만나 "광주사건은 김대중과 일부 용공분자들이 일으킨 내란이니 여러분들이 보도에 협조해 주길 바란다"며 압력을 행사했다. 이런 장면들과 함께 "이날 전두환은 이들에게 1인당 백만원씩의 촌지를 돌렸다"는 나레이션이 나오고 '무정부 상태의 광주', '폭동', '난동자' 등으로 광주와 시민군을 매도한 당시 언론 보도를 보여줌으로써 '부역언론'의 여론조작 실상을 드러냈다.


이처럼 광주항쟁의 실체를 다루려는 노력은 그 동안 5·18을 다룬 드라마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신군부의 핵심세력이 여전히 기득권을 누리면서, 반성은커녕 <제5공화국>의 대본 수정을 요구할 만큼 과거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상황에서 <제5공화국>이 보인 모습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특히 당시 전두환을 찬양하며 신군부에 부역한 일부 족벌신문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5공화국>은 이들 족벌신문들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주었다.


한편 <제5공화국>은 왜 5·18이 반민주적 폭거에 저항한 '항쟁'인지를 상세하게 보여줬다.
당시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하는 한편 주요 정치인들을 연행하는 등 본격적으로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으며, 이 과정에서 광주시민들의 항거가 정권 찬탈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해 광주를 유혈진압 했다는 점을 <제5공화국>은 분명하게 지적했다. 신군부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해 재야민주화세력과 야당세력을 탄압하고, 항쟁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내란'으로,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아간 반민주적 폭거도 상세하게 다뤄졌다.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던 학생들과 시민들을 신군부가 공수부대를 동원해 총칼로 진압함으로써 광주시민들이 총을 들고 '시민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도 설득력있게 묘사됐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장면에서 당시 자료화면을 사용한 점이나, 5.18 청문회 장면과 당시 언론보도를 삽입한 것 등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넣으면서도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광주항쟁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과정 등을 극적으로 그려내 사실성과 극적 감동을 동시에 획득했다.
6월 25일 방송(19회)에서 전두환이 허화평으로부터 광주 상황을 보고 받는 장면은 신군부와 광주시민 가운데 누구에게 정당성이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전두환은 허화평으로부터 광주외곽을 순찰하던 공수부대가 어린이들을 오인 사격해 9명이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고 "그럼 광주는? 광주에도 총기가 깔려 있으니 무슨 사고가 생겼을 것 아닌가"라고 묻자 허화평은 "그게 희한할만큼 조용합니다. 은행이나 신용금고를 약탈하거나 하다 못해 도둑과 강도도 없다는 보고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전두환이 "이봐 보고가 잘못된 거 아냐, 아니 총이 5000정이나 깔렸다는데 약탈이 한 건 없었다는 게 말이 돼"라며 어이없어한다. 이 장면은 실제 광주에서 있었던 진실을 바탕한 것으로 당시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했던 신군부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냈다.
또 계엄군의 도청진입을 앞둔 시민군이 외신기자와의 회견에서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 "우리의 죽음은 저들의 야만성을 증명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기록할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바로 이 땅에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시 살아날 겁니다"라고 대답하는 장면, 시민군 중 도청에 끝까지 남을 사람을 정하면서 윤상원 열사가 "폭도는 계엄군이고 바로 이 정권입니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우리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이라는 폭도를 맞아 싸우다 죽었다는 것을 역사는 기록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여기 남아 죽어야 합니다. 저는 여기에 남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당시 신군부에 맞서 온몸을 던졌던 시민군의 정신을 시청자들이 생생히 느끼게 했다.


<제5공화국> 방송 초기 일각에서 '전두환 미화'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이번 5·18 방송분은 이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다만 드라마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픽션'이 이후 <제5공화국>에서 다뤄질 실제 있었던 일들에 자칫 오해를 부르지 않도록 신중해주길 바란다.
<제 5공화국>은 앞으로 삼청교육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6월항쟁, 6.29선언 등 5공화국 시기의 민감한 사안들을 다룰 예정이다. 앞으로도 시청자들이 불행했던 현대사와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민주화운동'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주길 기대한다. <끝>

 


2005년 7월 6일

 

(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방송모니터위원회